빈섬 '오래된 봄날의 기억' - 그때 쳥량리역 교외선 열차엔 야전족들이 '모리나'를 틀었다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70년대 봄날 청량리역 교외선 열차에는 어김없이 통기타와 야외전축을 든 장발의 청춘들이 올라왔다. 큼직한 손잡이가 달려있는 ‘야전’은 트랜지스터 라디오(55년 출시) 이후에 가장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스테레오가 되지 않는 모노 스피커와 33과 45 중에서 곡의 빠르기를 선택하는 회전 조절 스위치가 달린 단순한 구조였지만 이 ‘움직이는 음악실’은 고고열풍을 야외로 확산시켰다.
종로와 을지로 세운상가에서 산 해적판(백판이라고 불렀다) LP를 한장에 500원씩 주고 사서 전축 위에 올렸다. CCR의 '헤이 투나잇‘ ’모리나‘’프라우드 매리‘, 톰 존스의 ’킵온러닝‘이 강촌의 풀밭과 대성리의 모래밭을 춤추게 했다. 지직거리는 잡음을 함께 들으며 일부러 찢은 교모를 눌러쓰고 나팔바지로 만든 교련복 끝자락을 펄럭이며 정말 끝도 없이 흔들었다.
’서니텐 타임‘(고고춤을 추는 시간, ‘흔들어주세요’라는 CF에서 나온 말), ‘고부갈등’(고고 출까 블(부)루스 출까 고민)이란 유행어가 나오는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런데 한껏 고조된 흥분이 진정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이들은 열차 안에서도 고고춤을 췄고 다른 승객들과 시비를 붙는 일이 잦았다. 78년 4월에는 열차간의 고고족 21명이 즉심에 넘겨지기도 했다.
‘고고’는 60년대초 뉴욕의 ‘위스키아 고고(Whiskya Gogo)’라는 술집 이름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 뜻은 ’한잔 먹고 시작하자‘쯤 된다. 이곳에서 노래하던 자니 리버스라는 가수가 세계에 전파시킨 흥겨운 록앤롤풍 음악은, 이 땅의 70년대를 뒤흔든다. 고고가 우리나라에 상륙한 것은 65년이었지만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69년 여름 그룹사운드 콘테스트가 시작되면서이다. 스텝이 따로 없는 쉬운 춤이라 10대들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특히 파트너가 필요없다는 이유 때문에 처음엔 ’건전한 춤‘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한곡 추는데 1000여번의 몸동작을 반복해야 하기에 거의 ’운동‘에 가까웠지만 힘겨워하기는 커녕 신나게들 추었다.
71년 서울에는 호텔내 고고클럽이 10여곳 있었다. 저녁답부터 이튿날 통금이 끝나는 새벽4시까지 철야를 하는 곳도 3곳이 있었다. 새벽이 되면 춤추다 지쳐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서로 기대며 통금이 풀리기를 기다린다. 새벽 4시. 호텔 앞이 북적거리고 택시들은 이들을 청진동 해장국집이나 마포 설렁탕집으로 실어나른다. 72년 10월 서울시는 이 춤을 ‘퇴폐’로 규정짓고 금지령을 내린다. 이듬해 겨울엔 고고파티를 벌이던 대학생 71명을 연행하기도 했다. 밤10시가 되면 라디오에서 ‘사랑의 종소리’가 댕댕 울린다.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들은 숨어서 흔들며 밤을 샜다. 화신백화점 뒤의 학원골목과 서린동, 관수동, 무교동, 명동, 로열호텔 주변은 당시 청소년 우범지역으로 꼽혔다.
고고클럽은 두번의 참사를 빚는다. 74년 11월 대왕코너 화재. 사망자 88명중 78명은 고고클럽에서 춤추던 사람들이었다. 신문은 ‘화마(火魔)와 춤춘 철야 고고’라고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83년 4월엔 대구 향촌동의 고고클럽 ‘초원의 집’에서 불이 났다. 25명이 숨지고 69명이 다쳤는데, 대부분이 청소년이었다. 이 사건으로 고고클럽들은 자정 이후 영업이 금지됐다.
이 고고열병을 돈벌이로 활용하고자 하는 상혼도 기승을 부렸다. 77년 5월 명동에 있는 다방 10여곳은 ‘초저녁고고’ 라는 간판을 내걸어 물의를 일으켰다. 10대들을 겨냥해 고고장 변태영업을 하는 다방이었다. 81년 광희동의 한 고고클럽은 손님 136명 전원이 미성년자로 밝혀져 분노를 자아냈다. 당국은 고고광풍을 잠재우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뜻밖에도 78년 존 트래볼타가 그 일을 해냈다.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와 ‘그리스’는 순식간에 고고클럽을 디스코데크로 바꿔놓았다. 하얀 바지에 T셔츠를 입고 격렬하게 뒤트는 디스코는 10년의 고고판을 갈아치운다.
그 시끌벅적하던 고고도 가고 디스코도 간 2016년 봄날, 가무민족의 춤바람이 통째로 식었는지 번성하던 노래방도 시들해졌고 아웃도어 댄싱 풍경도 볼 길이 없다. 그저 흐드러진 이팝꽃들만 갑작스런 5월 강풍과 장대비에 미친 듯 춤을 추고 있을 뿐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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