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2016년 1월. 대한민국의 얼굴얼굴엔 웃음이 사라졌다. 청년들도 여성들도 노인들도 얼굴이 밝지 않다. 근로자들도 경영자들도 서민들도 기업들도 저마다 표정이 굳어있다. 어찌된 일일까. 아일랜드 출신의 프랑스 작가 사무엘 베케트(1906-1989)는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이 세상에 흐르는 눈물의 총량은 같고, 또한 웃음의 총량도 같다"고 갈파했다. 그렇다면 이 나라를 환하게 하던 그 웃음들은 모두 어디로 몰려가버린 것일까. 웃음은 어디 가고 이토록 침울한 표정들만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가. 왜 대통령의 얼굴은 싸늘하며 왜 정치인의 표정은 혼미하며 왜 국민들의 눈빛엔 총기가 보이지 않는가. 이 나라 사람들을 반짝이게 하던 '웃음'들의 행방불명. 왜 아무도 이 '국보급 정신'의 실종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가.
이 나라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저마다 웃음기를 잃어가는 가장 큰 원인은, 삶의 품질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용 한파의 직격탄을 맞은 청년들은 취업도 하기 전에 백수로 내몰리고, 100세 시대를 맞아 떠도는 노인들은 생계 문제와 소외에 시달리고, 여성들은 겉도는 보육정책과 경력단절에 불안해하고, 근로자들은 비정규직과 임금피크제로 싸움을 벌이고 있고, 글로벌 경기는 한치 앞을 보기 어렵고, 세계의 갈등들은 리스크를 키우고 있으며, 북한은 핵무기를 쏘아대고, 청와대와 여당은 코앞에 다가온 총선에 자기 편 금배지를 많이 만들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인상이며, 야당은 아예 당이 나뉘어져 서로 충돌하고 있는 양상이다. 4색당쟁이 따로 없다. 국가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도 보이지 않고 경제를 일신할 책임감 있는 열정도 도태된 듯 하다. 그러니 어디서 웃음이 솟아날 것이며 어느 구석에서 희망이 돋아날 것인가. 구석구석의 통증들이 안면의 경련을 늘리고 있을 뿐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처럼 웃음을 좋아해온 민족도 드물 것이다. 겨레붙이는 늘 하회탈처럼 파안대소하며 웃었고 껑충껑충 포복절도하며 웃었다. 우리 동이족(東夷族)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飮酒歌舞]을 몹시도 좋아하는 낙천적인 민족이었다. 외부의 침략과 굴욕적인 압제를 이겨내고, 거대한 재난과 감당하기 어려운 수모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한 바탕 웃음으로 모든 부정적인 것을 물리치는 '하회탈 정신'이 아니었을까. 임진왜란, 병자호란도 견뎌냈고, 일제의 폭압과 참혹한 한국전쟁도 이겨냈다.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강산에서 산업을 일궈내고 경제를 키워올려 60여년만에 글로벌한 경쟁력을 갖춘 나라로 만든 것은,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낙천주의와 희망의 위력이었다. 가까이는 세월호의 비탄과 메르스의 공포도 이기고 여기까지 걸어왔다. 웃음과 낙천주의는 우리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웃음은 박물관에 가서 찾아야 하는가. 방송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며 그나마 위안을 받는 까닭은, 20여년 전의 후진 골목에서 오순도순 살던 사람들이 나누던 소박하고 계산없는 웃음을 만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골목의 낮과 밤을 열심히 살아가는 아낙과 남정네들의 킥킥거리는 소리들, 그 골방의 아이들이 모여앉아 음식을 나눠먹으며 나누는 농담들에서, 지금 우리에게 없는 '진귀한 웃음'을 발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1988년에게 응답하라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1988년이 우리에게 '웃음'으로 응답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일까.
디지털 문명으로 접어들면서 우린 웃음조차도 '^^' 따위의 이모티콘이나 'ㅋㅋㅋ' 따위의 '깨진 글자'로 표현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얼굴은 굳은 채로 표정은 식은 채로, 손가락으로 두들긴 자판이 만드는 웃음을 제 얼굴인양 유통시키는 일을 우린 일상처럼 여겨왔다. 웃는 시늉엔 익숙하지만 정작 웃음에 인색해지고 웃는 일이 어색해졌다. "웃으면 복이 와요"라고 외치며, 배삼룡 구봉서로 절정을 이뤘던 슬랩스틱 코미디는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한 '흘러간 웃음'이 되었고, 한때 방송사마다 경쟁적으로 주말 시청자들을 웃기며 성업을 이뤘던 개그프로들은 '웃음'의 생산을 대폭 줄이거나 포기하고는 '수다'예능 쪽으로 몰려갔다. 정치판에서 상대를 향해 쏟아내는 말들은 가시 돋친 독설과 야유, 냉소만 있을 뿐, 유머나 해학이 사라져버렸다. 인터넷에 들끓는 댓글들 또한 조악한 욕설이나 일방통행의 언어배설들이 횡행할 뿐, 여유있는 관점과 이해와 배려의 시선을 찾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현상들 또한 '노소(no笑, 웃음 없는)사회'의 징후들일지 모른다.
웃음이 절실하다. 웃음은 공동체의 깊어가는 소외를 극복하고 유대감과 동질성을 회복하는 원초적인 힘이다. 불황을 떠도는 불안감과 불신감. 절망감을 이겨내는데도 이만한 묘약이 없을 것이다. 작은 웃음, 서먹한 웃음이라도 아끼지 말고 '마중물'처럼 만들어내야 한다. 민생의 온기는 우선 저 '잃어버린 웃음'을 찾아주는데 있으며, 기업의 활력 또한 기업구성원들의 긍정적인 열정에서 피어난다. 정치와 경제와 사회가 국민의 웃음을 다시 지펴야 할 때가 됐다. 웃음이 심신의 건강증진제이며 웃음이 희망의 불쏘시개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아시아경제는 이 땅의 '노소족(族)'에게 '잃어버린 하회탈'을 다시 찾아줄 큰 리더십을 기다린다. 민심은 지금 저 굳어있는 슬픈 얼굴에 있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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