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면 떠나야하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으로 시작하는 청춘이란 가사가 무한 반복되는 늦가을이면 가을에만 피는 꽃을 보러 가야 한다. 피어서 사흘을 못 간다는 봄꽃과 달리 ‘알록달록한 가을 단풍은 좀 더 볼 기회가 많겠지’라며 한껏 게으름을 피우다 보면 밥 벌어 먹고 살기에 바빠 단풍꽃도 제대로 못 보고 찬란한 가을을 그냥 보내기 쉽다. 그러니 떠날 수밖에.
벌거숭이산에 가을꽃이 피다
‘정선에서 바라보는 하늘이란 마치 깊은 우물에 비치는 하늘만큼이나 좁다’라는 글귀가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울릉도에서 바다 자랑이 금물이라면 정선에서는 산 자랑이 금물이다. 가리왕산, 노추산, 각희산 등 1,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즐비한 정선에서 그래도 산 하나쯤 오르고 싶다면 당연히 민둥산이다. 마침 민둥산을 찾은 때가 가을이라면 당신은 복받은 사람이다. 물론 그 복 나눠 가지러 너도 나도 그곳으로 몰려든 사람들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민둥산의 높이는 1,119미터로 힘들게 정상을 올라도 소나무 한 그루 볼 수 없는 벌거숭이산이다. 석회암 지대인 데다 옛날에 산나물을 많이 나게 하려고 해마다 불을 질렀기 때문이란다. 요즘 정상을 차지한 것은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는 온통 억새뿐이다. 8부 능선에서 정상까지 20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능선에 억새꽃이 은빛 물결로 하늘거린다. 포천 명성산, 창년 화왕산, 밀양 사자평, 장흥 천관산과 함께 전국 5대 억새풀 군락지 중 하나인데 황홀하기로는 민둥산이 최고다.
비록 정상에 변변한 나무 한 그루 없지만 산행길이 만만한 것은 아니다. 네 개의 등산로가 있는데 증산초등학교 앞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쉼터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왕복 3시간짜리 코스가 인기다. 급경사 구간은 짧지만 역시 만만치 않은 상급자 코스다.
민둥산에서 꼽는 장관은 민둥산의 표지석을 에워싼 사람들이다. 너도 나도 그 앞에서의 기념 촬영을 희망하니 민둥산은 둥산은 잃어버리고 ‘민’만 보인다. 돈과 명예만 최고인 줄 알고 그보다 가치 있는 걸 놓치고 사는 누구의 모습과 닮았다.
민둥산도 식후경, 정선의 곤드레밥
미식가들 사이에 전국 맛지도 공식이란 게 있는 모양이다. 춘천에 가면 닭갈비와 막국수, 강릉은 초당두부와 커피, 속초는 아바이순대, 삼척은 곰칫국, 동해는 섭칼국수, 횡성은 한우, 인제는 황태, 양양은 송이를 맛봐야 한다나! 산나물 왕국 정선하면 곤드레나물부터 떠오른다. 국화과의 풀로 강원도에서는 도깨비엉겅퀴라고도 부른다는데 보랏빛 꽃이 황홀하게 예쁘다.
곤드레나물은 다른 나물과 달리 독성이 없어 여러 날을 먹어도 탈이 나거나 질리지 않는다고 한다. 먹을 것이 귀한 강원도 사람들은 이 나물로 밥도 지어먹고 죽도 쑤어 먹고 반찬도 만들어 먹으며 보릿고개를 넘겼다 전해 들었다. 구황식물이었던 나물은 이제 일부러 찾아가서 먹는 건강식이자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는 전국구 음식이 됐다.
정선 읍내에는 곤드레나물밥집이 여럿 있는데 싸리골식당을 즐겨 찾는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곤드레나물밥에 자박장이나 양념간장, 고추장이 딸려 나온다. 자박장은 곤드레나물 향을 그윽하고 고소하게 맛볼 수 있고, 양념간장은 감칠맛이 난다. 시래기 된장국을 곁들여 나물밥 한 대접을 뚝딱 비우고 나서는데, “귀한 건 아니지만 여행길에 간식으로 먹어요”라며 주인아주머니가 누룽지를 쥐어주셨다. 정선 엄마의 마음은 곤드레나물밥처럼 구수했다.
소곤소곤 Tip
산골 아낙들이 힘을 합쳐 운영하는 자연 밥집인 ‘농가맛집 노다지’에서는 까만 된장에 두부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묵은 산나물로 끓인 구수한 된장찌개와 곤드레김치를 맛볼 수 있다. 또 산야초가 많이 나는 정선이라 족발에도 황기를 넣어 삶는데 정선 안팎으로 소문난 집은 ‘동광식당’이다. 가마솥에 삶은 족발은 껍질은 쫄깃하고 살은 야들야들하다.
Information
정선군 종합관광안내소 ww.ariaritour.com (1544-9053)
민둥산 강원도 정선군 남면 민둥산로 12
싸리골식당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정선로 1312 (033-562-4554)
농가맛집 노다지 강원도 정선군 화암면 소금강로 973 (033-563-6224)
동광식당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녹송1길 27 (033-53-3100)
글=조경자, 사진=황승희
글쓴이 조경자는 <때때로 대한민국> <때때로 교토> 등을 쓴 책 만드는 여행가다. 일본대중문화잡지와 요리 전문 월간지 기자로 일하며 하루 여섯 끼도 거뜬한 식탐가, 지도를 맛집으로 파악하는 미식가, 애주가로 지냈다. 지금은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고 빵을 굽고 바느질을 하면서 때때로 책을 만들고 여행을 떠난다. http://blog.naver.com/travelfo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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