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정치인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있게 한 장본인으로 회자된다. 노 전 대통령을 정치에 입문시킨 사람이 바로 YS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부민사건의 변호를 맡은 후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13대 총선에서 새 인물을 찾고 있던 통일민주당 총재 YS의 눈에 띄게 됐고 YS의 지원에 힘입은 그는 부산 동구에서 금뱃지를 달면서 정치에 입문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남달랐다. 1989년 당시 국회에서 5공 비리·광주 사태 특별위원회의 증인 출석을 정부·여당에서 방해하자 노 전 대통령은 이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번복하는 등 고군분투를 벌였다. 이때 YS는 그를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서 용돈도 넉넉히 지원해 주고 격려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1990년 민주정의당ㆍ통일민주당ㆍ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을 기점으로 갈라서게 된다. YS가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창당하는 3당 합당 선언을 하자 노 전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의 배신이자 밀실야합'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하며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YS와 결별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정치적 노선을 택했지만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직후 당시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서는 IMF 등 한국경제파탄의 책임을 묻고자 YS를 경제청문회 증인으로 채택하려했다. 이때 이를 극구 반대한 사람은 노 전 대통령이었다.
당시 여당의 부총재였던 노 전 대통령은 “5공 때나 광주청문회와는 달리 정책실책을 따지기 위한 자리에 굳이 전직대통령 증인 채택에 매달리는 것은 잘못”이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YS는 참여정부 출범 후 보수정치권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노 전 대통령을 향해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2003년 8월에는 노 대통령을 겨냥해 “참으로 무능하고, 무지하고, 대책 없는 정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04년 탄핵 정국 땐 “노무현을 정계에 입문 시킨 만큼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잘 되기를 바랐지만 그동안 여러차례 충고도 했다”며 “그럼에도 이를 소홀히 한 채 일방적으로 국정을 운영해서 이런 결과가 온 것”이라며 쓴소리를 했다.
장준우 기자 sowha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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