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벼랑 위에 길이, 겨우 있다
나는 이 옛길을 걸으며 짚어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없는 발소리 위에 내 발소리를 들여놓아 보며 얼마나 오래 발 소리가 쌓여야 발자국이 되고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쌓여야 조붓한 길이 되는지
그해 겨울 당신이 북쪽으로 떠나고
해마다 눈발이 벼랑 끝에 서서 울었던 것은,
이 길이 벼랑의 감지 못한 눈꺼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안도현의 '문경 옛길'
문경 고모산성 성벽을 따라 들면, 영남대로 중에 가장 험한 길이었던 토끼벼루가 나온다. '벼루'는 벼랑을 뜻하는 말로, 고려 왕권이 신라왕을 견훤의 공격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황급히 이동하기 위해 이용했던 길이, 토끼벼루였다. 고모산의 험한 지형에 막혀 길을 놓쳤는데, 토끼 한 마리가 낭떠러지 한켠에 붙어 달려가는 것을 보고, 이 길을 군사 이동로로 이용했다는 스토리가 남아있다. 안도현은 토끼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벼랑의 소롯길 위에서 이 아름다운 시를 떠올렸을 것이다.
길은 인간에게 깨달음의 원천이며 공부의 질료였다. 걷는 것이 수행이며 진리는 도(道)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었다. 인류가 생겨난 처음에는 길이 없었다. 누군가 어떤 방향으로 첫 발자국을 찍고, 누군가 그 발자국을 믿어 다시 발자국을 찍었을 때, 흔적이 또렷해졌고, 발자국들의 쌓여 바닥이 다져지면서 길이 된다. 길은 앞서 간 사람에 대한 신뢰의 자취이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안전함을 담보하는 기표이다. 길의 상념을 안도현은 어떻게 열어가는가.
발소리 위에 발소리를 얹고 발소리가 쌓여 발자국이 되고 발자국이 쌓여 길이 된다는 이 생각. 마음이 쌓여 사박거리는 소리를 만들고 자취를 만들고 그것이 길이 되었다는 이 생각. 조선시대 여인 이옥봉이 읊었던 '꿈의 영혼(夢魂)'에 나오는 문전석로반성사(門前石路半成沙)가 떠오른다. 꿈 속에서 워낙 그대 집으로 향하는 길을 자주 걸어 다녔기에, 꿈의 영혼이 걷는 길에도 자취가 난다면, 문앞에 있는 그 돌길은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거라고, 살짝 과장해보이는 그 애교가 곱고 아름다웠다.
좁고 험하고 어려운 길일수록 걸어가고픈 마음은 더 하다. 안도현은 그 문경 옛길을 '벼랑의 감지 못한 눈꺼풀'이라고 했다. 토끼벼루를 따라 홀연히 가버린 여자 하나가 펑펑 내리는 눈발 속에 눈에 밟히는, 그런 일이 내겐들 왜 없겠는가. 이 감미로운 상심을 안도현은 책임져야 한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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