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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샘]오래된 찻잔의 아름다움

시계아이콘01분 17초 소요

차심이라는 말 있지/찻잔을 닦지 않아 물이끼가 끼었나 했더니/차심으로 찻잔을 길들이는 거라 했지/가마 속에서 흙과 유약이 다를 때 그릇에 잔금이 생겨요/뜨거운 찻물이 금 속을 파고 들어가/그릇색이 점점 바뀌는 겁니다/차심 박힌 그릇의 금은 병균도 막아주고/그릇을 더 단단하게 조여준다고…/불가마 속의 고통을 다스리는 차심,/그게 차의 마음이라는 말처럼 들렸지/수백 년 동안 대를 이은 차에선/차심만 우려도 차맛이 난다는데/갈라진 너와 나 사이에도 그런 빛깔을 우릴 수 있다면/아픈 금 속으로 찻물을 내리면서/금마저 몸의 일부인양   손택수의 '차심'


몇 년 전 문경에 갔을 때, 그곳에서 유명한 차 사발 만드는 곳을 들렀었다. 거실엔 마치 밥그릇처럼 사발이 널려 있었는데, 함께 갔던 문경시의 공무원이 귀띔해주었다. 저 그릇 하나가 대개 몇백만 원씩 하는 것이라고.

시내로 나와, 어느 반듯한 집에 창호가 단아하게 발라진 문을 드르륵 열게 되었는데, 거기서 사십대의 향취가 느껴지는 한 여인이 단아하게 나서서 나를 반겼다. 이 여인은 문경에서 다도교실을 여는 '차선생님'이었다. 문경에는 칠월칠석에 '차그릇 축제'가 열리는데, 도예의 명장들이 새로 만든 신품을 놓고 겨루는 게 아니라, 오래 써서 때를 탄 다기들이 출전하여 그 진면목을 겨루는 경기라는 것을 알려준 것도 그분이었다. 나는 놀랐다. 왜 새 그릇을 가지고 겨루지 않고 낡은 그릇을 놓고 경쟁하는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분은 내 눈을 한참 쳐다보시면서 "선생님, 오래된 것이 왜 아름다운지 아세요?"라고 물었다.


그가 내게 말해준 것은 손택수 시인이 말하는, 바로 그 차심이었다. 찻물이 찻잔의 미세한 금 속에 들어가 마치 제집처럼 자리를 잡으면서 찻잔에 피어나는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오래 설명했다. 이곳 사람들은 찻잔을 많이 보았는지라, 오래된 그릇에 새겨진 찻물의 무늬를 감식하고 그 미감을 느끼는 데 아주 섬세하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고온 속에서 구워지면서 온몸을 굳혀가던 와중의 파열의 금들은 그릇을 파편으로 흩으려하지 않고 제 몸의 원형을 기억하면서 그 속에서 마치 그릇의 흙살인 것처럼 제 미세한 허공의 양쪽을 붙든다.

노오랗게 찻물이 든 찻잔의 아름다움. 이것은 차를 담는 그릇과 그것에 담기는 차가 어떻게 한 몸이 되어 전심전령의 빛을 내는가를 보여주는 듯했다. 막 구워낸 찻잔이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다다를 수도 없는, 그윽하고 고요하며 순수한 이 빛깔을 뭐라 부를까. 이것이 우리가 나이 먹는 것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이것이 우리가 삶의 수많은 얼룩들을 아름답게 우리 넋에 배어들게 한, 마흔쯤, 쉰쯤, 예순쯤의 정결이 아닐까를 생각해보는 날이었다. 그날을 생각하며 저 시를 감격스레 읽어보는 것이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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