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소설가 신경숙씨의 표절 논란 속에 문단에서는 총체적인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신씨의 표절 의혹은 15년 전부터 제기돼 온 문제이지만 그동안 출판 상업주의와 문단 내 형성된 '침묵의 카르텔'로 인해 묻힌 한국문학의 현실이 재조명되고 있다.
23일 표절 논란과 관련한 긴급 토론회가 서울 홍대 인근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장장 2시간 반 넘게 지속됐다. 이 토론회는 문화연대와 한국작가회의가 공동으로 열었다. 문인과 평론가들은 신씨 개인의 표절 문제를 넘어 한국문단의 폐쇄성과 이윤지상주의가 만든 문학권력 시스템, 이로 인해 빚어진 표절 사태 등을 전반적으로 짚으며 건강한 문학생태계를 위한 방식들을 논의했다.
◆신경숙 표절 의혹 제기 해묵은 이야기지만 묻힌 까닭= 우선 토론회에 참여한 이들은 신씨의 '전설'이 일본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는 데 대부분 동의했다. 또한 신씨의 표절의혹이 이번만이 아니라 이미 1999년에도 제기돼 왔음을 상기시켰다. 발제를 맡은 평론가 이명원씨(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당시 한겨레 문학전문기자가 칼럼에서 밝힌 신씨의 단편소설 '딸기밭'이 안승준의 유고집 '살아있는 것이오'를 표절한 사실과 신씨의 장편 '기차는 7시에 떠나네'와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신씨의 단편 '작별인사'와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가족'이 각각 모티프와 구조가 유사하거나 동일하다는 문학평론가 박철화의 지적이 과거에도 있었음을 설명했다. 이씨는 "이미 15년 전에 매듭짓고 성찰해야 했었다. 2000년대 초반 출판시장 지형이 바뀌었고 신경숙에 대한 비평적 논의가 실리기 어려운 실정이 됐다"고 했다.
또 다른 발제자인 문학평론가 오창은씨(중앙대 교양학부대학 교수) 역시 "박철화, 정문순, 김명인, 이명원 등 과거 상당히 전투적인 평론가들이 문제제기를 했지만 묻혔다. 이는 1990년대부터 출판상업주의와 동인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문학권력의 폐쇄성에 원인이 있다"며 "1990년대는 '창비'와 '문학과사회', '세계의문학'의 질서 속에 '문학동네'가 문학의 상징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이었고 '문학동네'는 '신경숙 신화'의 주역이었다"고 했다.
토론자로 나선 문학평론가 정은경씨(원광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신경숙의 '외딴방'은 1993년 문학동네라는 신생출판사에서 낸 작품이다. 창비는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의 가치를 지닌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출판사인데 만해문학상을 1996년 신경숙에게 줬다. 창비가 가졌던 이념, 가치 지향성이 허물어진 사건이며, 상업·대중성이라는 코드로 통합돼가는 시점이라 본다"고 부연했다.
◆'신경숙 표절, 문단과 우리 사회의 문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신경숙이 고작 표절하는 소설가라는 것에 독자들은 깊은 실망감에 빠졌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작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데 토론의 방점이 찍혔다. 토론자로 발언한 시인 심보선씨(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이번 사안에 대한 창비와 문학동네의 입장을 보면 스스로를 '한국문학과 동고동락해온 출판사' '한국문학이 독자의 신뢰를 찾아가겠다'는 표현이 있다. 이윤 지상주의와 한국문학 지상주의가 기이한 방식으로 결탁돼 있는 모습이다"라며 "이것이 바로 끝내 표절을 표절이라 말하지 못하고 있는 사태로 만들었다"고 했다. 심씨는 이어 "이번 문제는 문학시장, 권력화된 시스템에 결부된 작가들과 평론가들의 문제다. 특정작가를 애호하고 비호하는 관행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정은경씨는 문단의 문제에서 나아가 '우리 사회의 문제'라며 확대해 생각해볼 것을 제안했다. 정씨는 "신경숙 표절 사건은 가치지향성을 버린 우리 사회의 문제다. 가치실종의 징후가 아닐까. 문학권력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시대 우리의 문제다. 이번 사안에 대한 SNS상의 조롱하는 발언과 반응들이 놀랍고 한국문학이 스캔들로 번진 것에 화가 난다"고 했다.
◆표절 문제 해법 그리고 건강한 문학생태계의 길은?= 이날 신씨의 사과가 경향신문 인터뷰를 통해 전해지면서 또 한 번의 파장이 일었다. 독자들에게 신씨의 인터뷰 내용은 진정성 있는 사과 같지 않았고 표절을 확실하게 인정하는 태도 역시 볼 수 없었다. 이명원씨는 "이번 논란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 아쉬운 측면이 있다. 신씨의 표절과 관련된 출판사들은 논란이 되고 있는 작품에 대한 자체 검토와 함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문인사회에서도 표절과 관련한 윤리규정, 규범 등을 만들 필요가 있으며 한국문학에 대한 넓은 의미의 성찰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정원옥씨(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는 유명작가가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글을 아무렇지도 않게 표절하는 사례를 언급하며 가해자에 대한 징계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피해를 당하고 그것에 대해 인정과 사과를 받을 때까지 과정은 너무 가혹하다. 주변에선 피해자에게 핀잔을 주는 등 내부 고발자처럼 몰아가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문학권력의 패쇄성을 탈피하고 건강한 문학생태계를 이루는 방식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심보선씨는 "많은 작가들은 안다. 문학잡지와 출판사에 지나치게 의탁할 경우 자신의 글이 얼마나 망가지는지 안다. 자율성이 바로 글쓰기의 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또 "일부 젊은 작가들은 최근 기성문학잡지나 문학단체와 무관하게 여러 가지 실천들을 해왔다. 304낭독회 등이 그 예다. 유명, 무명작가의 구별이 없고 시민들도 참여한다. 정치권력과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고 본다"며 "외부의 개입 없이 독립잡지를 만들고, 독자들 역시 베스트셀러를 맹신하지 않고 소모임을 꾸려 다양한 작품을 읽고 토론한다. 이런 흐름이 한국문학의 자정작용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이번 토론회 자리 역시 그렇다"고 강조했다.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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