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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 금성라디오, 삼표연탄, 락희치약, 반달표 스타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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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 '어제의 나 같은'...

[아시아경제 ]

[허진석의 책과 저자] 금성라디오, 삼표연탄, 락희치약, 반달표 스타킹... 윤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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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그대는 내가 소유하기에는 과분하고/그대는 그대의 가치를 충분히 알지니/그대의 가치를 담은 계약서는 그대를 풀어주나니/그대와 나와의 인연은 이제 모두 끝났도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87번. 그 첫 단락에서 영문학자 공성욱은 문학에 대한 함의를 본다. 그는 "문학은 작가가 의도한 가치 속에 매몰된 것이 아니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항상 열려진 공간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아치볼드 맥리시가 '시법(Ars Poetica)'에서 말했듯, "시란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A poem should not mean But be)이다. 시의 의미는 독자, 극이라면 관객이 부여한다. 이를 자크 데리다는 '의미의 산종'(dissemination)으로, 해롤드 블룸은 '창조적 수정작용'(act of creative correction)으로 보았다.

"재춘이 엄마가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보아라, 저/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菴) 같은 절에 가서/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 밖에 없어서/'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중략) 재춘아, 공부 잘해라!"


윤제림(55)의 시, '재춘이 엄마'다. 시를 읽지 않는 독자라도 낯설지 않으리라. 맞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SK그룹이 2009년 9월부터 'OK! SK, 당신이 행복입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캠페인 광고를 내보낼 때 등장한 '카피'다. 메시지는 명료하다. '자식의 이름으로 사는 엄마의 행복'. 시인 최형심은 "진솔함 하나만으로 읽는 이를 압도해 버리는 시"라고 했다. 그러나 맥리시 식으로 읽으면 의미를 부여하고 자시고 할 것 없다. 그렇다면 시인 윤제림에게 시와 카피, 시와 산문의 거리는 멀지 않은 것도 같다.

[허진석의 책과 저자] 금성라디오, 삼표연탄, 락희치약, 반달표 스타킹... 고물과 보물

윤제림은 올해 봄에 산문집 '고물과 보물'을 냈다. 부제는 '20세기 브랜드에 관한 명상'이다. 그는 시인 윤제림,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겸 카피라이터 윤준호로서 산다. '고물과 보물'은 윤준호의 이름으로 냈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 책을 '시인의 산문'이라는 올가미에서 빼낸다. 하지만 시인의 산문 쓰기에 대해 묻자, 그는 꽤 길게 말했다. 청나라 시인 오교(吳喬)를 인용했다. "산문은 밥이요, 시는 술이다". 윤제림은 설명하기를, "쌀이 있으니 '밥을 짓자'고 하면 산문을 쓰는 자다. '술을 빚자'고 하면 시인이다"라고 했다. "시인의 영혼과 카피라이터의 본능이 100% 컨버팅되는가." 그는 "최소한 섞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산문을 쓰는 이유는 "술로 연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물과 보물'은 사물에 대한 산문이다. 윤제림은 산문을 통하여 사물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그는 '물활론'이라고 했다. 책의 서문에 썼다. "그것들이 말했다"고. 윤제림은 "내 글쓰기는 '받아쓰기'다. 사람, 짐승, 식물이 나에게 대신 말해 달라고 외치고 떠들고 속삭인다. 그래서 감각기관 중에 귀가 가장 중요하다." 윤제림의 시에는 상품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첫 시집은 '삼천리자전거'다. '고물과 보물'은 '금성라디오', '락희치약', '반달표 스타킹' 같은 상품에 대해 말한다. '삼표연탄'을 읽자.


"연탄은 희생과 겸양의 태도를 가르칩니다. 그렇게 소중한 운명을 타고나서도, 연탄은 그 누구한테도 젠체하거나 비싸게 굴지 않습니다. 거지 아이의 동전 몇 개에도 제 몸을 내줍니다. 1970년의 어느 연탄 광고에는 이런 카피가 보입니다. "해마다 서울 백만 가정의 겨울을 지킵니다." 아, 일 년이면 몇 장이나 되는 연탄이 스스로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한 것일까요. 모든 연탄 광고가 한결같이 '화력 좋고 오래 탄다'는 것을 강조할 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탄은 그 뜨거운 불속에서 얼마나 참고 견뎠을까요."


윤제림은 서문을 통하여 생각을 먼저 드러낸다. "전화기가 신체의 일부처럼 되어서 동서남북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며 신기해하던 선배가 소통이 되지 않는 세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눈뜨면 문자메시지를 찍어 날리고 쉼 없이 메일을 주고받는 젊은이가 외롭다고 눈물짓습니다." 그의 글 어딘가에 '눈물 같은 것'이 더러 비친다. "그러니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로 나아가려면 '어제'의 나를 반추해보는 일이 의무라는 것!"이라든가, "고물이 보물이 되는 데는 우리들 정신의 즉흥성이, 우리들 심신의 가벼움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새것을 좋아할 수는 있으나 해묵은 것, 때 전 것들이 그렇게 너절하고 고약한 것만은 아님을 우리들은 왜 모르고 컸단 말인가" 같은 출판사 서평은 실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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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을 지난 일요일(14일) 오전에 이태원에 있는 그의 집 근처에서 만났다. '카피' 의뢰를 받아 토요일 저녁부터 밤을 샜다고 했다.


<윤준호 지음/난다/1만4000원>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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