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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블랙홀'…금고, 어둠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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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의 고백 "5만원권이 나온 뒤, 나는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10년도 안돼 4배 커진 금고사랑…'돈맥경화'의 혐의자

[아시아경제 이창환 기자] 제 키는 90센티미터(cm)에 불과하지만 몸무게는 200킬로그램(㎏)이나 나갑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제 사촌 중에는 몸무게가 500㎏이 넘는 육중한 분들도 계십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저는 웬만한 화재에는 끄떡도 없고, 비를 맞아도 괜찮습니다. 심지어 10미터(M) 높이에서 떨어져도 아무 이상이 없을 정도로 튼튼합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제 입은 아주 아주 무겁습니다. 주인 이외에는 제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이미 눈치를 채 신 분들이 있네요. 맞습니다. 제 이름은 금고, 전문용어로는 '가정용 내화금고'라고 합니다.


키에 비해 제가 뚱뚱한 것은 '안전성' 때문입니다. 제 입속에 온갖 귀중품이 들어 있는데 도둑이 통째로 들고 가버리면 아무리 좋은 자물쇠로 채워둬도 소용이 없는 탓에 뚱뚱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안전성과 저는 일심동체입니다.

저의 안전성이 얼마나 뛰어난 지 입증된 과거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2004년에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에서 큰 불이 났던 것을 기억하시죠. 당시 불로 인해 보물 479호인 낙산사 동종마저 녹았지만 저만은 유일하게 화마를 견뎌냈답니다.


거센 불길 속에서도 내부에 보관됐던 중요 문서 등은 흠집하나 없이 지켜내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저는 1000℃ 이상의 불 속에서도 1시간 이상 견딜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직함 덕분일까요. 저의 인기는 요즘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습니다.


저는 한때 돈 많은 부자나 기업 회장님들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평범한 가정에서도 쓰일 만큼 대중화됐습니다. 예쁜 디자인과 높아진 실용성 때문인지, 요즘은 가정주부들도 저를 많이 찾습니다.


저의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는 음지성 때문에 저를 찾는 분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저에게는 아직 지하경제의 대명사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은행 등 금융회사에 당당하게 돈을 보관하지 못하는 분들이 지금도 저를 많이 애용하십니다.


저를 찾는 현상은 2009년 이후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2009년은 바로 5만원권이 발행되던 해입니다. 5만원권은 1만원권에 비해 부피가 작고 비교적 큰 금액을 보관하기 쉬워 저에 대한 필요성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는 통계로도 잘 나타납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에 발행된 5만원권의 환수율은 지난해 기준으로 29%에 불과합니다. 환수율은 특정 기간 한국은행이 공급한 화폐 가운데 시중에서 사용되다가 다시 은행으로 돌아온 비율을 뜻합니다. 한국은행에서 시중은행으로 방출된 5만원권 10장중 3장도 안돌아왔다는 뜻입니다.


그럼 나머지 7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시중에서 건강하게 유통되는 5만원권이 더 많겠지만 일부는 분명히 저나 제 사촌들 안에서 고이 잠자고 있다고 보시면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합니다. 또 일부는 어쩌면 시골 마늘밭 같은 곳에 파묻혀 있을 수도 있고요.

5만원권이 발행된 2009년을 전후로 저를 찾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난 것도 사실입니다. 2000년대 후반 200억원대에 불과했던 국내 금고시장은 현재 800억원대로 커졌습니다.


요즘은 5만원권과 함께 골드바(Gold Bar)도 제법 제 입속으로 들어옵니다. 초저금리가 지속되면서 금에 투자하는 분들이 많은데, 보관은 제몫입니다.


저를 찾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지하경제가 더 커질 것이라는 비난도 귀에 들립니다.


지난해 국회예산정책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지하경제 규모는 약 26%에 달했습니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 지하경제 규모인 18.4%보다 훨씬 높은 수치죠.


청와대와 정부에서는 수년전부터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 수치는 10여년 전과 달라진 바 없다고 하네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뜨끔하기도 하고 가끔은 씁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전 요즘 살맛이 납니다. 해외에서도 저를 찾는 분들이 많아 제 인기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창환 기자 goldfish@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이창환 기자 goldfis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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