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나석윤 기자] 경기장에 나와 마운드에서 내려오기까지 3분 남짓. 짧은 시간이지만 시구에 대한 팬들과 선수들의 관심은 뜨겁다. 특히 최근에는 유명인사나 톱스타들이 자주 등장해 야구장의 색다른 볼거리로 자리를 잡았다.
프로야구에서 시구가 이벤트로 자리 잡은 시기는 2007년부터다. 각 구단은 시구에 변화를 주면서 이전까지 다소 무거운 '행사'로 진행되던 시구에 즐거움을 가미했다. 연예인들이 시구자로 마운드에 자주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 레깅스 시구, 클라라를 알리다 = 모델겸 방송인 클라라 씨(28ㆍ본명 이성민)에게 2013년 5월 3일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프로야구 LG와 두산의 경기에 앞서 시구를 했다. 관중들은 클라라 씨의 옷차림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단으로부터 미리 받아 몸에 딱 달라붙게 손질한 경기복 상의, 그리고 흰색 줄무늬 레깅스.
이 차림은 한 해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클라라 씨를 설명하는 상징이 됐다. 그 날의 기억은 클라라 씨의 가슴 속에 즐겁고 감동적인 순간으로 남았다. 7일 전화 인터뷰에서 그 때의 일을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당시의 기쁨이 그대로 묻어났다.
클라라 씨는 "다리가 길어보이게 하려고 세로 줄무늬가 들어간 레깅스를 입었는데 그 의상이 화제를 몰고 올 줄은 몰랐다"며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명으로 생활한 내게 수많은 관중이 보내는 함성은 정말 기분 좋게 들렸다. 경기장에 나가기 전 긴장이 많이 됐지만 큰 함성소리에 긴장도 풀렸고 그래서 준비했던 동작도 잘 해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연예인으로 어떤 수식어를 갖는 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 날의 시구는 클라라라는 사람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했다.
◆ 개념시구의 원조 홍드로 = 클라라 씨가 등장하기 전까지 '시구의 여왕'은 탤런트 홍수아 씨(28)였다. 그의 시구는 여성으로서 지키고 싶었을 아름다움조차 포기하고 오직 시구 자체에 몰입했다는 점에서 파격적이었다.
그 전까지 시구를 위해 마운드에 오르면서도 하이힐을 고집했던 여성들과 달리 홍수아 씨는 2005년 7월 8일 삼성과 두산의 잠실 경기에 앞서 운동화를 신은 채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얼굴이 일그러질 만큼 힘을 모아 시속 76㎞에 이르는 빠른 공을 포수 미트에 꽂아넣었다. 그 표정과 팔의 각도가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페드로 마르티네즈(42)와 닮았다 하여 그에게는 '홍드로'라는 별명도 붙었다. 그의 시구는 '개념시구'가 됐다.
공을 던지는 실력만 따진다면 방송인겸 모델 이수정 씨(27)를 빠뜨릴 수 없다. 2011년 10월 11일 광주구장에서 열린 SK와 KIA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시구를 한 이수정 씨는 투수들이 경기에서 실제 사용하는 마운드의 투구판을 밟고 포수 글러브까지 정확히 공을 던졌다.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하일성 KBS 해설위원(65)은 "보통은 마운드에서 내려와 (마운드와 타석 사이) 중간 지점에서 던지는데 꽤 멀리서 던지는데요"라며 의아해하다가 시구가 끝나자 "투구판을 밟고 포수에게까지 던진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잘 던지네요"라며 놀라워 했다. 이수정 씨가 마운드에서 긴 머리를 고쳐 묶자 "준비를 하지 않고 나왔다"며 불편한 내색을 하던 중계 캐스터도 감탄했다.
◆ 미국을 놀라게 한 신수지의 백일루션 시구 = 홍수아 씨나 이수정 씨는 정통 시구로 주목을 받았지만 리듬체조 국가대표 출신 방송인 신수지 씨(23)는 특기를 살린 개성 넘치는 투구 동작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지난해 7월 5일 삼성과 두산의 잠실 경기에 앞서 리듬체조 기술인 '백일루션(오른발로 지탱한 채 온 몸을 360도 회전시키는 동작)'을 활용해 유연하면서도 정확한 시구를 했다. 신수지 씨의 시구는 미국 언론에도 소개될만큼 큰 관심을 일으켰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MLB.com은 메인 화면에 신수지의 시구 장면을 소개한 뒤 "당신이 봤을 시구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이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의 시구는 패션(fashion), 역학(mechanics), 결과(results) 3박자를 모두 갖췄다"고 극찬했다. 또 태권도 선수 출신인 배우 태미 씨(24)는 지난해 8월 17일 SK와 두산의 잠실구장 경기에서 앞서 한 차례 공중 제비를 한 뒤 공을 던졌다.
대체로 예쁜 여성 연예인이나 방송인들이 시구를 하고 나면 많은 화제가 샘솟고 인터넷 공간에서도 화제가 된다. 지난해 배우 손예진 씨(32)는 11월 1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두산의 한국시리즈 7차전에 앞서 시구를 해 경기장 분위기를 후끈 달궜다. 박근혜 대통령(62)은 이 시리즈 3차전(잠실)에 등장해 시구했다. 프로야구 방송 진행자인 공서영 씨(32)는 올해 4월 3일 잠실에서 열린 SK와 LG의 경기에 앞서 LG 경기복을 입고 모자를 쓴 채 등장했다.
◆ 감동…모현희 여사와 박찬호 = 지난해 10월 28일 삼성과 두산의 한국시리즈 4차전이 열린 잠실구장. 경기 시작에 앞서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 한 분이 마운드에 올랐다. 주인공은 1960년대 국내 최초 여성 장내 아나운서로 활동한 모현희(74) 씨였다. 모 씨는 1960년부터 6년 동안 동대문야구장에서 장내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시구에 앞서서는 양 팀의 선발 출전선수 명단을 특유의 목소리로 읽어 중년 야구팬들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모 씨의 시구와 관련해서는 재미난 뒷얘기도 있다. 그가 시구를 한 경기는 한국시리즈 4차전이었지만 3차전 시구자로 대기했다는 이야기다. 하루 전날인 10월 27일 한국시리즈 3차전 시구자는 박 대통령이었는데, 경호상의 문제로 시구가 어려워질 경우 모 씨가 대신 마운드에 오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코리안특급' 박찬호 씨(41)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지난달 18일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에서 열린 2014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은퇴식과 함께 시구자로 나섰다. 빙그레 유니폼을 입고 팬들에 인사한 박찬호는 시포자 김경문 NC 감독(56)을 향해 공을 던졌다.
김 감독은 박찬호의 공주고 선배로, 이날 시포자로 나선 것은 박찬호의 특별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찬호가 던지고 김경문이 받는 모습은 단순히 시구의 의미를 넘어 한국 야구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자 선후배 간의 우애를 느낄 수 있는 훈훈한 연출이었다.
◆ 시구자는 어떻게 선정? 준비과정은? = 프로야구 각 구단은 홈경기를 이용해 연간 30~40회가량 시구 행사를 연다. 서울을 연고로 하는 두산과 LG의 경우도 올해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시즌 초를 제외하고 각각 열 차례와 서른 차례 행사를 했다. 현재 시구는 정규리그 경기와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때는 홈 구단에서, 올스타전과 한국시리즈 경기에서는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주관해 진행한다.
시구자를 선정하는 데 별도의 기준이나 자격요건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보통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유명인이 선정되는 경우가 많다. 행사에 앞서 구단에서는 시구자를 선정하고, 2~3주 전쯤 일정을 조율한다. 시구자가 경기장에 도착하는 시간은 1시간~1시간 30분 전. 구단은 시구자에게 유니폼과 모자, 글러브 등을 제공하는데, 별도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시구자 측에서 직접 유니폼을 제작해 착용하기도 한다.
시구자가 여성일 경우에는 사전에 20~30분 정도 실내연습장에서 교육을 받는다. 이 때 교육은 홈 팀 투수 한 명과 투수코치 한 명이 담당한다. 투구 동작, 포수와 사인을 주고 받는 모습 등을 시구자에 알려준다. 이왕돈 두산 베어스 마케팅팀 차장(40)은 "시구 방식과 콘셉트는 자유롭게 논의하지만 마운드가 갖는 의미와 신성함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원칙"이라며 "경기에 영향을 준다거나 하는 과도한 세리머니는 되도록 배제하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나석윤 기자 seokyun198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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