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사전을 들여다봤다. 압도적(壓倒的)이라는 말을 어떨 때 쓸까 궁금해서였다. 사전에서는 이 낱말을 ‘뛰어난 힘이나 재주로 남을 눌러 꼼짝 못하게 하는, 또는 그런 것’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글쓴이가 이 말을 떠올린 건 브라질 축구 때문이다.
29일 새벽(한국시간) 브라질은 벨루오리존치 미네이랑 경기장에서 열린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칠레와 16강 경기에서 연장 접전 끝에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3-2로 이겨 힘겹게 준준결승에 올랐다. 1958년 스웨덴 대회에서 ‘미성년자’인 펠레를 앞세워 꼭 갖고 싶었던 줄리메컵을 품에 안은 브라질은 이후 1962년 칠레 대회와 1970년 멕시코 대회, 1994년 미국 대회, 2002년 한일 대회 등 네 차례 더 월드컵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이번 대회에서 여섯 번째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물론 강력한 우승 후보다.
그런데 칠레와 경기를 지켜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브라질 축구가 압도적이진 않구나’라는 것이었다. 8강전에서 만나는 콜롬비아는 같은 남미 대륙이니 축구 스타일이 비슷할 터. 그러나 준결승에서 맞붙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독일(또는 프랑스), 그리고 예측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결승에서 겨루게 될 네덜란드(또는 벨기에)는 뛰어난 체격 조건을 바탕으로 미드필드에서 강한 압박을 구사하는 유럽 스타일이어서 브라질로서는 쉽지 않은 경기들이 될 것이다. 만일 아르헨티나와 맞붙는다면 남미의 양대 산맥이 월드컵 사상 처음으로 결승에서 격돌하는 것이어서 오히려 유럽 나라보다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글쓴이가 브라질 축구를 처음으로 본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0년 5월이었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청룡(국가 대표 1진), 백호(국가 대표 2진)와 브라질 클럽 오랄리아의 친선경기였다. 브라질에는 워낙 많은 축구 클럽이 있고 주(州)별로 리그가 따로 운영되고 있기도 한데 오랄리아는 방한 경기를 할 무렵인 1970년대 초 세리에 A(브라질 1부 리그)에서 활동했다. 요즘은 세리에 A~D에도 들어 있지 않은 군소 클럽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 무렵 한국을 찾은 브라질 팀에는 상파울루주 선발 같은 수준이 의심스런 팀도 있었다. 아무튼 그때 기억은 브라질 국가가 꽤 길었다는 것과 아시아 여섯 개국 순방(여행 삼아 나선 듯) 가운데 한국에 들러서인지 성의껏 경기를 하지 않았다는 정도다. 소문(?)으로 듣던 브라질 축구가 아니었다. 백호와 1-1로 비겼고 청룡과도 1-1,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런 글쓴이의 섣부른 판단은 불과 얼마 뒤 완전히 깨졌다. 그해 6월 멕시코에서 열린 제 9회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눈을 의심케 하는 놀라운 경기력을 보이면서 통산 세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은 중, 장년 팬들에게는 국내에 처음으로 중계 방송된 대회로 기억된다. 캐스터 이철원-해설 주영광(작고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출전) 콤비가 멕시코-소련의 개막전부터 브라질-이탈리아의 결승까지 모든 경기를 생방송 또는 녹화로 중계했다. 당시 MBC 화면이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던 건 멕시코에서는 컬러로 중계했으나 국내에서는 흑백으로 방영했기 때문이다.
브라질은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기 전 동유럽의 강호인 체코슬로바키아(1962년 월드컵 준우승 1964년 도쿄 올림픽 은메달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를 4-1로 대파한 데 이어 잉글랜드를 1-0, 루마니아를 3-2로 물리치고 가볍게 8강에 올랐다. 준준결승에서 만난 페루에는 불세출의 축구 선수 테오필로 쿠비야스가 활약하고 있었지만 브라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4-2, 브라질의 완승이었다. 4강전에서 우루과이를 3-1로 완파한 브라질은 결승전에서는 일방적인 경기 끝에 펠레-게르손-자이르지뉴-알베르투의 연속 골로 이탈리아를 4-1로 물리쳤다. 6경기 19득점 7실점의 매우 공격적인 기록이었고 1958년 스웨덴과 치른 결승에서 기록한 3점차 승리(5-2)와 타이를 이뤘다. 결승전 최다 점수 차(3) 승리 기록은 여전히 브라질이 갖고 있다.
월드컵 첫 우승 때 17살 소년이었던 펠레는 29살의 원숙한 플레이어가 돼 있었고 ‘하얀 펠레’ 토스타오는 ‘2014 브라질’의 네이마르에 못지않은 빠른 발과 눈부신 개인기를 갖고 있었다. 자이르지뉴는 헐크를 연상하게 하는 저돌적인 돌파력을 보였고 리베리노는 ‘2014 브라질’의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오버래핑을 갖고 있었다.
‘1970 브라질’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세계 축구 정상에 섰다. 국내 프로야구계의 우스갯소리 가운데 하나인, 엉터리 영어 약자 ‘UTU'(올라갈 팀은 올라간다)처럼 칠레전 고비를 넘긴 브라질이 결승까지 올라갈 수는 있을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2014 브라질’은 ‘1970 브라질’에 견주면 수준 차가 대학생, 중학생 정도라고나 할까.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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