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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백지화라는 말(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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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백지화라는 말(44) 낱말의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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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글자로 이뤄진 말 중에 이만큼 오묘한 말도 없으리라. 낙서와 오기(誤記)들의 누더기를 원바탕의 새하얀 종이로 바꾸는 놀라운 마술이 이 낱말 속에 깃들어있다. 더러워진 옷감을 하얗게 빨아내듯 우리의 행위, 우리의 마음, 우리의 의도, 우리의 실수도 처음처럼 다시 표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불화의 끝자락에 서먹해진 마음, 좋아했던 마음들이 엇나간 리바운드가 미움으로 더욱 튀어올랐던, 어느 대상에 대한 너덜너덜한 감정마저도 저 꿈의 세탁기에 모두 집어넣어 뽀송뽀송하게 되살려낼 수 있다면!

백지화란 우리 삶이 꿈꾸는 덧없는 희망사항 중의 하나인지 모른다. 저 잔인하고 냉혹한 일회성의 법칙, <일도창해하면 돌아오지 못하는> 비정한 불가역성의 원리, 한번 구겨버린 종이는 수천배의 노력을 기울여도 처음의 상태로 회복할 수 없다는 엔트로피의 법칙등이 백지화의 꿈을 비웃는다.


인간이 과거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과거의 만만찮았던 현실의 문맥을 겅중겅중 건망증으로 잘라먹는 때문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처음이라는 시공(時空) 속에 주어졌던 감미로운 여백의 기억이 진하게 살아 꿈틀거리기 때문인지 모른다. 처음은 늘 얼마나 설레고 좋았던가? 첫 키스, 첫 수업, 첫 사랑, 첫 걸음마, 첫 눈물, 첫 이별, 처음 성병에 걸린 일마저도 처음이었기에 빈 종이같이 환한 시작들은 늘 기꺼이 떨려오는 마음자리가 아니었던가? 하얀 백지,그 텅빈 여백에서 나는 하나의 점으로, 하나의 선으로, 하나의 면적으로 그리고 다면체의 덩어리로 차원을 초월하여 왔던 것이 아니었던가?

돌아보면 나의 행위, 나의 정신,나의 실수,나의 죄악 마저도 처음엔 여백 속의 작은 망설임이었다. 처음엔 얼마나 아름답게 살고자 하였던가? 그것이 어느날 뜻 않이도 삐딱한 어느 샛길로 샜다. 삶을 허황하게 만들고 고통과 한숨을 불러온 건 그 처음을 잃어버린 뒤부터였다. 처음엔 저 여백,저 하얀 세상을 언제 다 메울까 하며 아득해하고 막막해 하였는데, 돌아보면 그 분투 그 고독 그 초발심이 엊그제인데 어느새 여백없이 꽉 채워진 나의 고집들,나의 형식들이 살아있음마저 죄고 비튼다.


이런 날들에 문득 생각해보는 백지화란 놀라운 복음만 같다. 모든 것을 하얗게 지워낼 수 있다면...없었던 일로 해주세요, 머리 한번 긁적이며 삶을 번복할 수 있다면... 골프처럼 멀리건 하나 받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내가 다시 하얀 종이가 되면 나는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인가? 내가 살아온 이 누더기 길이 그나마 나의 베스트,내게 과분한 길은 아니었던가?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는 어떤 노래처럼 현실을 대긍정하는 자신만만함을 뵈줄 것인가? 한번 와도 이미 숨찬 길, 어쩌다 왔지만 다시 오라면 죽어도 못올 아사리판같은 삶을 왜 다시 리바이블한단 말인가? 됐다 됐어.한번으로 족해. 백지화는 무슨 백지화? 누런 종이로 이대로 휴지될래,하는 마음일까?


그러나 여전히 백지화는 감미롭다. 내가 다시 하얀 종이가 되어, 내가 가보지 못한 삶들, 내가 꿈꾸었지만 잃어버린 세상들, 내 생각보다 너절하게 살아버린 시간들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여백 위에 다시 선다는 상상은 아름답다.


하지만 백지화란 말이, 그런 괜찮은 상상에 쓰여지지 않는 게 탈이다. 일을 엄벙덤벙 처리해놓고서리 뒷감당이 안될 때 슬그머니 뒷발 빼는 것을 백지화라고 하고, 애당초 무리하지만 나름의 속셈을 담은 어떤 사업을, 권력이 슬쩍 여론시험용으로 내놨다가는 여차하면 후다닥 접는 수단이 백지화가 되었으니 이야말로 기막히는 언어모독이다. 그때의 백지화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큰 일을 한참 분탕질 쳐놓고 "잊어주세요"라고 대책없이 최면거는 강한 자의 무책임 플러스 변덕이다. 정책의 당국자들은 이 백지화를 이용하여 국민들의 머리 속을 비워나간다.아직 정리안된 머리를 쾅 치며, 백지화라니깐,하며 망각의 사술(詐術)을 들이댄다. 온갖 백지화의 의식절개 수술은 사람을 허탈하고 황당하게 만든다.


하나의 언어가 담을 수 있는 의미 그릇과 그 안에 담긴 현실이 어찌 이리 다른가?


완전한 원상회복, 완전한 첫마음에의 귀의, 비어있기의 꿈, 그런 백지화의 희원(希願)들은 공허하게 하나의 누더기,하나의 허튼 소리, 하나의 공염불만 덧대고 덧이어 <백지화> 스스로를 백지화하는 비극적인 운명의 낱말이 되었다. 대신 거짓 꿈을 주었다 지웠다 하는 수상하고 파렴치한 백지화만이 신문의 주먹 만한 표제로 떠올라, 사람들의 머리통에 터프하게 매직펜으로 쫙쫙 엑스자를 긋는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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