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和는 서로 다른 생각을 조정하는 일의 실패이다.
두 사람 사이에 있어야할 화(和)가 사라져버린 상태,
그 온화함이 잠적한 자리에 남은 쓸쓸한 공기,
그것이 불화이다.
서로 다른 생각은 불화 이전에도 있었다.
불화 이전에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거나
알아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어떤 계기가 이견을 부각시키고 그 이견들의 한쪽에
자기를 세워,
차전놀이를 하는 차의 두 꼭대기처럼
서로 자기를 세워올린다. 그리고는
이견의 가파른 접점을 확인하고는, 저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구나,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구나,로 비약한 뒤
흥분과 실망을 안고 되돌아 내려온다. 아주 급히.
그리고는 오로지 그 이견의 기억 만을 과장하고
그 기억의 꼬리표에 상대에 대한 분개나 증오를 붙여
바라본다. 어쩌면 불화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견을 바라보는 것이다.
불화를, 그러나 간직해야할 때가 있다.
칼날처럼 맞선 이견을 똑바로 바라봐야할 때가 있다.
그 차이에 주목하고 그 차이로서 냉철하게 존재를 인식해야 할 때도
있다. 그 불화는 사소한 불화가 아니라
치명적인 불화이다. 어떤 개인과의 불화가 아니라 집단에 대한 불화,
권력에 대한 불화, 중심에 대한 불화, 삶 전체에 대한 불화가
그것이다. 내가 오직 집단과 무난하게만 지내지 않고,
권력과 그럭저럭 친하지 않고 중심에 빌붙지 않고
삶 전체에 카랑카랑한 이견을 세워가는 일.
그건 삶을 번거롭게 하고, 수고스럽게 하지만,
그것이 '나'를 구성하는 특징들의 각(角)이다.
문제는 그 싸움들이 불화이냐 투정이냐,이다.
불화는 이견을 드러내며 자기를 관철해나가는 위험하고 고독한
투쟁이지만, 투정은 이견을 드러내는 척 하며 중심에 더 찰싹 달라붙기 위한
전략이다. 시대에 대한 불화는 내 삶의 묵직한 궤적이지만
시대에 대한 투정은, 투정 속에 비겁하게 감춘
시대에 대한 두려움이다. 투정 속에는 이미 이견이 없다.
불화의 시늉들이 판치는 사회에서는 논쟁이 이미 논쟁이 아니다.
교묘한 언질들을 포장하는 노하우들의 잔치일 뿐,
결코 문제의 중심으로 접근하지 않으며, 고통스런 진실을 위해
나아가지 않는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지식을 팔아가며, 불화를 가장한 투정을 부려왔는가.
성나지 않았으면서도 성난 얼굴로,
문제의 변죽을 울리는 가짜 시비를 붙어왔는가.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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