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반복(TAUTOLOGY)에 관해 인상적인 주장을 한 사람은 비트겐슈타인이었다. 모든 필연적인 명제는 동어반복이다. 모든 필연적인 명제는 어떤 의미에서 같은 것을 말하고 있으며 결국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이런 생각은 ‘타당성’이라는 언어철학적 개념의 선구가 된다. 동어반복이 만들어내는 의미와 한 사회에서 수용되는 방식에 주목하는 것은, 때로 유익하다.
'좋은 게 좋다'는 말은 일종의 동어반복이다. 당연한 말이다. 좋은 게 좋지 않거나 좋지 않은 게 좋은 것은 모순이다. 좋은 게 좋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추가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런데 왜 이 말이 널리 쓰이는 것일까. 동어반복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문제는, 그 말이 지닌 외연(外延)이다. 앞의 좋음과 뒤의 좋음은 같은 말이나, 우리가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다른 커버리지와 뉘앙스를 지닌다.
앞의 좋음은 진짜 좋은 게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는 좋지 않으나 좋은 것처럼 보이는 외견상의 좋음이거나, 좋지 않은 점을 가지고 있지만 앞으로 좋을 수 있는 무엇이다. 좋지 않으나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수단과 방법은 좋지 않으나, 결과나 평가가 좋을 수 있는 것일 수 있다. 좋음으로 잘못 알고 있으나 분위기를 깨기 어려운 경우의 좋음일 수도 있다. 또 결과적으로 좋은 일을 가리킬 수도 있다. 요컨대 앞의 좋음은 발화자가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좋음이다. 대개 나쁨에 가깝다.
뒤의 좋음은 앞의 ‘나쁨’을 좋음으로 동의해주는 일이다. 좋지않다고 말할 경우에 생겨날 문제와 파장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에서의 좋음이다. 뒤의 좋음은 타협의 효용과 혜택을 의미한다. 세상살이의 많은 미립들은 이런 좋음을 권장하고 있기도 하다. 나쁨을 좋음으로 동의하는 일은, 비겁일 수도 있고 옳지 않은 타협일 수도 있고 곡학아세일 수도 있고 기준과 원칙의 파기일 수도 있고 현실을 핑계삼아 좋지 않은 것들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외면하는 일일 수도 있다.
‘좋은 게 좋다’라는 말에는,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가 서성거린다. 이방원의 좋음은 정몽주에게 현실적인 제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는 타협하지 않고 철퇴를 맞고 죽었다. 그에게는 좋음이 좋지 않은 것이었고, 그 좋지 않은 것이 차후 그에게 보다 좋은 것으로 될 수 있다는 이방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좋지 않은 것이 좋지 않다는 생각을 견지함으로써 그는 죽었고, 그 일은 그의 행위를 결과적으로 ‘좋음’으로 평가하는 시각을 만들어냈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이처럼 죽고사는 질문이며 죽음 이후에까지 간섭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진술의 문제는 '좋음'의 어떤 부분을 채택하느냐의 문제이다. 외견상 좋음이냐 진짜 좋음이냐. 외견상 좋음을 채택하는 일은 유리하고 진짜 좋음을 채택하는 일은 불리하다. 그때 좋음의 일부를 전체인 것처럼 말하는 태도가 바로 '좋은 게 좋다'라는 말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하는 세상에선 편의주의와 현실주의와 훼절과 타락이 재능과 요령과 분별과 지혜와 미덕으로 비친다. 큰 소리 내지 않고 얼렁뚱땅 해결하고, 문제 없이 대충 묻어두는 ‘협상’이 예찬된다. ‘좋은 게(것이) 좋은 것’이라는 말과 ‘좋은 것은 좋은 것’이라는 말은 다르다. 뒤의 명제야 말로 진정한 동어반복이다. ‘좋은 게 좋은 거여’라고 할 때의 비굴과는 달리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말하는 것은 용기다. ‘무늬만’ 좋은 것이 유통되는 세상이 ‘좋은 게 좋다’주의를 만든다. 이런 것에서 나의 이성과 판단은 안전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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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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