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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선즉제인(先則制人)(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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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선즉제인(先則制人)(26) 낱말의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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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창업일이나 신년 송년 무렵에, 한자로 된 4자성어 쓰는 일이 유행처럼 되었다. 특히 경영자나 정치가들이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스스로의 결의와 조직의 비전을 표현하는 일이 관행이 되었다. 그걸 위해 열심히 뭔가를 뒤적이거나 자문까지 받는 풍경을 생각하면 좀 안쓰럽고 우습기도 하지만 이래저래 한자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결과가 되었으니 국민소양을 위해선 그리 나쁘진 않은 듯 하다.

갑오경장이 있었던 해를 맞아, 해현경장(解弦更張)이라는 말을 쓰려고, 조사해보았더니, 이미 이 말을 쓴 기업가와 정치가가 수두룩했다. 삼성서도 쓰고 LG서도 쓰고, 여당 인사도 쓰고, 고위 공무원도 썼다. 해현경장은, 갑오경장 할 때의 경장(更張)의 원래 뜻이다. 낡은 거문고의 줄을 풀어서 갈아끼운 뒤 다시 팽팽하게 조인다는 의미로, 과감한 혁신 조치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여기서는, 단지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변화를 시스템화하는 과정까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의미심장하다. 혁신을 다시 팽팽하게 조여서 제대로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매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읊조린 뒤, 자신의 개혁의지를 그 위에 실었다. 둥기둥당. 거문고 소리와 함께 마음을 튕겨 내보냈을 것이다.


최근 LG의 한 경영자는 선즉제인(先則制人)이라는 말을 썼다. 이 기업의 오랜 콤플렉스가 맨날 뒷북치거나 2인자로 뛰는 것이었던지라, 이 말은 아주 착착 달라붙는다. 먼저 치면 남을 제압할 수 있다. 사뭇 전투적인 멘트이다. 선즉제인은 중국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말이다. 때는 진시황의 시대다. 진승과 오광이 농민반란을 일으켜 장초(張楚)라는 나라를 세운 뒤 진나라의 도읍인 함양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이때 은통(강동의 회계군수)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강서에서 진나라에 반기를 든 것은 진나라의 시운이 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수를 치면 남을 제압할 수 있고, 뒷북을 치면 남에게 제압당할 것이오(先則制人 後則人制). 지금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좋소."


은통의 말을 듣고 있던 이는 항량이란 사람이었다. 항량은 항우의 삼촌이다. 이 말을 듣고난 항량은 가만히 항우에게 눈짓을 해서 은통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후 항량은 회계 관아를 점거한 뒤 스스로 군수가 되어 함양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사한다. 이후 회계군의 총수가 된 조카 항우가 (유방과 더불어)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BC206년의 일이다.


선즉제인은 기회를 포착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사활을 건 전쟁의 시대, 치열한 각축의 시대에는 기회를 잡아내고 먼저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앞장서서 나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체득했다. 그러니 이 지혜는 얼마나 값진 것인가. 지금이 과연 그 초한지의 시대와 같은 때인지에 대한 성찰을 따로 필요하겠지만, 순식간에 기업의 뜨고지는 격변의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기에, '선즉제인'은 타이밍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명구절이 되어 울림을 준다.


선즉제인을 말하는 사람은, 그 마음 속에 천하통일과 같은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지 모른다. 무서운 사람이다. 그 목표를 위해선 스스로를 포함한 희생까지도 감수할 수 있다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다. 은통이 그런 지혜를 가졌고 항량은 그런 기회를 빼앗았고 항우는 그 흐름을 타고 최고의 목표에 도달했다. 낱말 하나 속에 들어있는, 뜨거운 야망과 거친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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