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학문 영역에서 가장 큰 화두는 '융합'이다.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있는 단일 학문의 시각에서 풀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전통적인 자연과학에 속하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 같은 인접 과학들 사이의 공동 연구들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더불어 서로 다른 분야로 간주돼 온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과 자연과학 간의 장벽을 허무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연구들이 수행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물질과 그 변화를 연구하는 '화학'은 다른 학문과 융합할 수 있는 어떤 소양들을 지니고 있을까.
우선 화학은 자연과학과 공학 내의 다른 학문 영역과 쉽게 결합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원자들 사이의 전자를 매개로 형성된 분자를 다루는 화학은 원자의 구조나 전자의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양자역학이나 전자기학 같은 물리학의 기초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 생명의 신비를 유전자의 관점에서 미시적으로 연구하는 분자생물학은 생체 분자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는 생화학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산업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재료, 에너지, 의약품 관련 연구와도 화학은 밀접히 연관돼 있다.
인문학의 핵심 주제는 자연과 인간 혹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다양한 '변화'다. 이 관계와 변화라는 개념을 고리로 인문학은 화학과 연결될 수 있다. 화학은 기본적으로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을 연구 대상으로 하지만 '化學'이라는 한자에서 잘 드러나듯이 주된 관심사가 물질 자체의 특성보다는 물질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그 결과로 이뤄지는 '변화'에 있다. 한 분자가 다른 분자로 변화하는 과정인 화학 반응의 성패는 처음의 반응물과 나중의 생성물 사이의 상대적인 에너지 차이와 두 분자 구조들 간의 상관관계에 좌우된다. 우리가 원하는 화학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응물과 생성물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전의 것들을 재배치해서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창작이라면 화학은 문학이나 예술과도 닮은 면이 많다. 하나의 문학 작품은 자음과 모음의 조합인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어 이 문장들을 유기적으로 배열함으로써 탄생하고, 한 곡의 음악은 서로 다른 높이와 길이를 가지는 음표들이 엮여 마디를 형성하고, 여러 마디들이 화성에 맞게 연결됨으로써 완성된다. 마찬가지로 화합물은 원자들의 다양한 화학 결합을 통해 특정한 성질을 나타내고 때로는 화합물끼리 복합체를 이루어 본래 화합물과는 전혀 다른 특색을 만들어낸다. 주고받는 말들의 미세한 뉘앙스 차이로 인해 칭찬과 비난이 교차되기도 하고, 우리 마음 속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공명하는 음악 한 소절에 웃고 울게 되듯이 화학에서도 같은 수와 같은 종류의 원자들로 이루어진 두 분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원자들 사이의 공간적 배치가 서로 다르면 한 분자는 약으로 쓰이고 다른 분자는 독이 될 수 있다. 원래 자연과학은 인문학이나 예술과 그 뿌리가 다르지 않다. 굳이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근대 과학자들 중에서 인문학자이면서 예술가인 인물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역사의 흔적은 대학에서 수여하는 최고 학위인 박사의 영문명 'Doctor of Philosophy'에도 남아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융합연구는 잊어버린 학문의 전통을회복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융합연구의 주된 목표는 이질적인 것들의 상호작용에서 나오는 창발성을 찾는 것이다. 요즈음 창조경제가 정책의 최우선 과제가 되면서 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 '창조'라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정권 초기에 자주 볼 수 있는 꽤 익숙한 풍경은 그다지 창조적이지 않아 보인다. 자유로운 원자들의 자발적인 자기조직화를 통해 새로움을 생성해내는 화학적 상상력이보다 창조적이지 않을까.
김태영 지스트(GIST)대학 기초교육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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