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최근 지방자치단체들이 한옥을 체계적으로 보전, 관리하기 위한 '한옥 플랜'을 제시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시 '한옥 선언', 전라남도 '천년 한옥', 전주시 '신 한옥 플랜' 등 중장기계획을 꼽을 수 있다. 이제는 한옥을 단순히 옛 가옥 또는 감정적 보존 대상만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한옥 본래의 특성을 이해하고 주거문화적 가치를 찾아 문화자원화하려는 작업이 펼쳐지고 있다.
서울시 '한옥 선언'은 2009∼2018년까지 총 3700억원을 투입, 4대문 안팎의 4500채(4대문 안 3080채·4대문 밖 1420채)를 보전하며 멸실 제어, 보존 지원, 신규 조성 등 중장기적인 전력을 담고 있다. 한옥 선언의 의미는 보존 위주의 정책에서 탈바꿈해 도시 고유의 경관 회복, 주거의 다양성 확보, 전통문화 거점 육성, 주거문화의 정체성 확보 등을 담고 있다는데 있다. 한옥 선언의 결과물이 바로 '북촌한옥마을'이다.
전라남도 '천년 한옥'과 전주시 '신 한옥 플랜' 역시 한옥의 집단적 존치, 한옥 개발·보급, 신규 단지 조성 등으로 지역문화 브랜드 차별화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이 지자체들은 서울과 달리 신규 보급에 집중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들은 한옥표준설계도 개발 및 보급, 신공법 개발, 목재 등 자재 표준화, 생산시설 인프라 구축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이에 올 초 '한옥위원회'를 구성, 새로운 한옥 정책을 수립해 가고 있는 서울 성북구의 차별적인 활동이 눈길을 끈다.
서울 성북구는 북촌 한옥마을에 이어 서울에선 두 번째로 장승업 옛터(동소문동)에서 돈암동 및 성락원, 앵두마을을 잇는 '선유골' 지역의 한옥마을 보전사업'을 진행한다. 이 일대는 북한산 구준봉 아래 숙정문 밖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성북천을 따라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는 마을로 예전부터 문학예술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성북구는 지난해 10월말 이 지역 일부를 '역사문화지구' 지구단위계획구역으로 지정한 바 있다.
한성대 입구역에서 서울 성북천을 따라 북한산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최순우 옛집'을 비롯해 소설가 이태준이 살았던 '수연산방',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 등 유서 깊은 한옥들을 만날 수 있다. 이외에도 간송미술관, 길상사, 변종하미술관, 삼청각, 서울성곽, 선잠단, 성락원, 한국가구박물관, 한국서예관, 스페이스캔, 이종석별장, 갤러리 오뉴월 등 역사·문화공간이 널려 있다.
특히 이 일대에는 북촌이나 서촌 등 서울을 대표하는 한옥마을 못지 않게 옛 정취를 간직한 골목길도 많다. 그러나 기와가 유실돼 방수천막을 덮은 지붕과 서까래가 드러난 집들도 수두룩하다. 심지어는 사람이 살지 않아 유실되기 직전인 집들도 있다. 일부 한옥들은 카페나 찻집, 갤러리, 사설 박물관 등으로 개조돼 주거로서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성북구에는 한옥이 서울시 전체 한옥의 11.8%인 1618채(2013년 12월 현재)가 있다. 특히 한옥은 정릉동 372번지 일대, 성북동1가 105-11번지 일대, 성북동 62-17번지 일대 3곳 등 성북천 일대에 밀집돼 있다. 이 일대는 한양도성의 동소문인 혜화문과 서울성곽의 동측에 위치하고 선잠단, 성락원 등 중요한 유적들이 자리해 역사문화콘텐츠가 즐비하다.
성북천 일대에는 문학예술인들이 많이 기거한 곳으로 유명하다. 김기창(화가)을 비롯해 김광섭(시인), 김환기(화가), 박래현(화가), 박태원(소설가), 윤이상(작곡가), 이태준(소설가), 전광용(소설가), 조지훈(시인), 한용운(시인·승려), 오세창(독립운동가), 이강(의친왕), 전형필(문화재 수집가) 등이 살았다. 그 이전에는 안견,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회화의 3대 거장인 장승업이 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오래전부터 이 지역을 서울시 한옥밀집지역으로 지정, 보존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성북구는 지난 2012년 서울시에 한옥밀집지역 지정을 요청했으나 아직까지 지지부진한 상태다. 4대문 밖 한옥 50채 이상인 지역의 한옥밀집지역 지정은 2015년 이후부터 가능하다고 명시한 서울 한옥 선언(2008년) 규정 때문이다.
이미 북촌 일대는 '한옥마을'로 지정돼 도시 정비가 이뤄지고 명소화된 공간으로 탈바꿈했으나 게스트 하우스, 카페, 찻집, 작은 상점, 공방들이 들어차면서 한옥 보전이라는 본래 의미가 크게 퇴색된 분위기다.
오늘날 쇠퇴한 도시의 문화 역량을 높이기 위해 수많은 정책과 비용이 투입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도심에서는 문화도시 혹은 문화역사마을 만들기, 궁궐·성터 등 유적 정비, 박물관·미술관·예술센터·공연장 등 인프라, 문화예술지구와 같은 예술창작벨트 조성 등 물리적 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이런 사업들은 도시 브랜드 홍보나 축제 등 이벤트를 위한 것처럼 본질이 결여돼 있다는 비판도 뒤따른다. 또한 역사·문화 복원 현장마다 섣부르고 왜곡된 정비 방식에 대한 반성에도 불구하고 크게 개선되지 않는 양상이다. 특히 절차와 방식의 관료성, 소통·토의·참여 부재, 사업기법의 후진성, 권력의 개입, 자생성이 없는 타율적 보호·육성책 등 다양한 문제들이 반복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문화도시, 생태문화도시, 과학문화도시, 산업문화도시 등 문화도시라는 명목의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으며 광주 등 아시아문화중심도시사업도 있다. 이런 사업들은 도시 재생, 즉 죽은 도시를 살리는 재창조과정에서 '문화적 처방'에 대한 시도로 평가할 만 하지만 분열과 갈등에 휘말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도심에 내재된 속성을 새롭게 발굴, 가치화하려는 작업이 요구된다. 성북구가 진행하는 '성북구 한옥마을 보전 사업'이 도시 재생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을 지 주목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에 전문가들이 대거 한옥 보전에 동참하고 나섰다.
지난달 15일 정미숙 한국가구박물관장, 송인호 서울시립대 건축학과 교수, 김개천 국민대학교 실내디자인과 교수, 우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등 한옥, 건축, 예술 전문가 12인이 '성북구 한옥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성북구 한옥 보전 지원정책, 한옥밀집지역의 지정·변경, 한옥 수선 등 기준의 수립·변경 및 구청장이 한옥의 보전과 관련해 요청하는 사항에 대한 심사 및 자문 역할을 수행한다. 위원회는 지난 6일 '제1차 한옥위원회'를 열고 서울시에 요청할 성북구 한옥밀집지역에 대한 자문을 실시했다. 이에 앞서 위원회는 전국 최초로 지역 내 현존하는 한옥에 대한 전수 조사 및 보전 방안 등을 담은 '성북구 한옥 보전 및 관리를 위한 기본 구상'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성북구 한옥위원회와 성북구는 올해 서울시 한옥밀집지역 지정을 위해 선잠단지 일대와 앵두마을 일대에 대한 지정을 재요청할 계획이다. 서울시 한옥밀집지역이 지정되면 한옥 신축 및 개보수 시 보조·융자금을 서울시비로 지원받을 수 있다.
이어 성북구 한옥위원회는 제2차 한옥위원회 안건으로 개별 한옥 지원 및 공공·민간부문의 한옥 디자인 가이드라인에 대한 상정을 준비할 계획이다. 그동안 ‘한옥보전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2012년 12월31일)하고 ‘한옥보전 및 관리를 위한 기본구상’ 완료(2013년 12월31일) 등을 진행한 성북구는 한옥위원회의 출범을 계기로 한옥보전 및 보급에 필요한 정책의 구상과 실현에 속도를 낼 방침이다.
송인호 위원(서울시립대 건축학과)은 “지자체 최초로 현존하는 한옥에 대한 전수조사를 진행하는 등 한옥 관련 의미 있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성북구에 대해 관계자들의 관심이 높다”며 “성북구 한옥위원회의 구성과 활동도 한옥의 발전과 활성화에 한 획을 긋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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