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6)
그때 두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말했다.
"나으리의 시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陶山月夜詠梅(도산월야영매, 도산 달밤에 매화를 읊다)를 현금(玄琴)으로 연주하고 싶습니다."
두향은 잠시 밖으로 나가 관원을 불러 악기를 대령시켰다. 거문고가 오자, 그녀는 그것을 품에 안고 눈을 지긋이 감으며 연주를 시작했다. 입으로는 가만히 시를 읊었다.
"노간의 시에 주자(회옹)는 느낌을 적어 답장했네
매화시(託梅)에 나오는 "함께 부끄러워한다"에 세 번이나 "그것 참!"이라고
老艮歸來感晦翁 노간귀래감회옹
託梅三復歎羞同 탁매삼복탄수동
퇴계도 같이 눈을 감고 두향의 거문고에 귀를 기울였다. 노간은 주자와 동시대의 시인인 간재(艮齋) 위원리(魏元履)이다. 간재가 편지에 매화시를 써서 보냈는데 한 구절이 주자를 사로잡았다. 그 구절은 수동도리미춘색(羞同桃李媚春色)이다. 복사꽃 오얏꽃과 함께 봄빛을 경쟁하는 일을 부끄러워 한다. 이런 의미이다. '수동(羞同)'은 매화가 바로 저런 허접한 꽃들과 함께함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주자는 말했다. 부끄러워할 것 뭐 있는가? 본색이 다르고 내공이 다르면 저절로 달라지는 것인데, 굳이 속세와 경쟁할 것까지 뭐 있는가. 이런 주자의 생각은 유학자들의 처세관 혹은 출세관과 밀접한 상관을 이루는 콘셉트가 된다. 퇴계는 생각했다. 이 여인이 나를 위로하고 있구나. 내가 한양의 정치적인 풍진을 피해 단양까지 내려온 그 마음을 이미 알고 있구나. 갑자기 이 여인이 몹시 사랑스러워져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두향아, 네 입술이 참으로 곱구나. 마치 두보의 시, 한 구절이 거기 머물러 있는 듯 하다."
그러자 그녀는 뺨이 발그레해졌다.
"나으리, 부끄럽사옵니다. 제게서 두보의 향기(杜香)을 맡으시려는 거지요?"
두향은 다시 거문고를 안는다.
"하늘의 때와 사람의 일은 나날이 달라지네
동지부터 양기가 생겨나서 봄이 또 오리니
수놓은 오색실로 길어지는 날을 재고
갈대 태운 재를 불어 한 해 날씨 점을 치네
물가의 버드나무 섣달에 벌써 싹이 트고
산들은 추운 날에 매화꽃을 피워내네
풍경이 내 고향과 다를 바가 없구나
잔들고 아이 불러 술 따르라 하네"
天時人事日相催 천시인사일상최
冬至陽生春又來 동지양생춘우래
刺繡五紋添弱線 자수오문첨약선
吹?六管動飛灰 취가육관동비회
岸容待臘將舒柳 안용대랍장서류
山意沖寒欲放梅 산의충한욕방매
雲物不殊鄕國異 운물불수향국이
敎兒且覆掌中盃 교아차복장중배
두보의 '소지(小至)' (* 소지(小至)는 '작은 동지(冬至)'라는 뜻으로 동지 전날을 말한다.)
두향은 거문고 선율에 시를 읊은 뒤 이렇게 말했다. "이 두시(杜詩)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은 산의충한욕방매(山意沖寒欲放梅)가 아닐까 싶어요. 산이 추운 날에, 속에서 꿈틀꿈틀하면서 매화를 피워낼 마음을 먹는 것이 눈에 선하게 느껴져요. 아마 두보도 동지에 매화가 정기를 머금는 것에 깊이 감명을 받고 있었던 것 같사옵니다."
퇴계는 눈에 가득 웃음을 매달고 이렇게 말했다.
"두향아, 너는 내 마음을 그대로 읽어내는 재주를 지녔구나. 그런데 나는 그 마지막 구절에 귀가 더욱 열린단다. 아이에게 술잔을 다시 술잔을 따르라고 재촉하는 모습 말이다."
"아, 나으리. 알겠사옵니다. 주안상을 준비하겠습니다."
"허허. 그래. 이제 너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구나. 당나라 황벽(黃蘗)선사가 읊은 선시 구절이 떠오르는구나. 뼛골 쑤시는 한기를 겪지 않았다면/코끝 찌르는 향기를 매화가 어찌 얻었으리(不是一番寒徹骨 불시일번한철골 爭得梅花撲鼻香 쟁득매화박비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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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두향아 너는 '辛酸'의 뜻을 아느냐
이상국 편집부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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