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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이 늙은이의 동무가 되어주겠느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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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4)

[千日野話]이 늙은이의 동무가 되어주겠느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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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가 이렇듯 번갈아 매화를 내미는 뜻이 필시 있을 듯하구나. 그를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여라."
"네에, 나으리."

관원은 욕을 듣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겼는지, 얼굴이 환해지며 달려나갔다. 퇴계는 한동안 분매에 시선을 붙였다가, 잠시 눈을 들어 빼꼼히 열린 방문 밖을 내다본다. 마당 한켠에 아침햇살이 내려앉아 있고 땅바닥에 참새 두 마리가 부리로 뭔가를 쪼면서 서로를 바라보며 재재거리고 있다.


"관기 두향, 대령하였사옵니다."
새들의 수작을 보는 일이 민망하여 다시 눈길을 거둬들인 퇴계가, 추위에 파래진 입술 같은 앵도톰한 꽃잎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소녀가 들어왔다. 뺨이 몹시 희고 콧매와 얼굴선이 곱다. 시골에 어찌 이런 자색(姿色)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열 일곱? 열 여덟? 그쯤 되어 보이는 여윈 아이다.

절을 하고 앉은 두향에게 퇴계가 물었다.
"저 매화는 자네가 보낸 것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어찌 하여 이걸 보냈는가? 더구나 돌려보냈는데 다시 보낸 뜻은 무엇인가?"
"매화는 인격화라 하여, 모름지기 그와 함께할 주인이 따로 있다고 들었습니다. 소녀, 박복하여 어미를 일찍 잃었으나 몇 개의 분매를 물려 받았습니다. 소시부터 매화를 키워서 이윽고 소매원(小梅園)이라 할 만큼 여러 개의 분매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생이 되어서도 이 버릇을 놓지 못하고 꽃을 가꾸며 마음을 닦는 경전인양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천하의 도학자인 퇴계 어른이 고을 수령으로 오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분매의 화격(花格)에 어울리는 분이라고 여겨 올리게 된 것입니다. 부디, 미천한 년의 정성이나마 물리치지 마시옵소서."
"음. 가상하구나. 하나, 내가 어찌 민(民)의 귀한 것을 취하겠느냐? 도리에도 맞지 않고, 또 지금 그런 것을 즐길 마음의 형편도 되지 못하니 거두어 가거라. 다만 그 뜻만을 받으리니, 꽃은 이제 되었다."
"나으리, 저는 나으리의 시 한 편을 외며 굳세고 어진 마음을 키웠사옵니다."
"이 궁벽한 곳에서 어찌 그런 걸 알았단 말이냐?"
"천한 것들이 음률로 익혀 부르고 있사옵니다."
"어떤 노래를 말하는 것이냐? 한번 불러볼 수 있겠느냐."
"예. 나으리."


한 그루 뜨락매화, 눈처럼 흰 꽃이 가지에 가득하구나
풍진세상 바다만한데, 연못 쯤 된다고 잘못 꿈꾸는가
옥당에 앉아 봄밤의 달을 대하니
기러기떼 울음 소리에도 제 생각이 있구나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차지)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퇴계는 눈을 감았다. 마흔 두 살 때 홍문관 부교리가 되어 옥당에 숙직 서던 밤에 읊었던 시다. 아직 추운 날 꽃을 가득 피워올린 매화를 보며 안쓰러운 마음을 드러냈는데, 깊은 생각(有所思)을 문득 한 소녀에게 들켰던 모양이다. 그는 물었다.
"이 시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더란 말이냐?"
"풍진은 바다인데 연못 쯤으로 잘못 꿈꾸는 게 아니냐는 그 표현이 깊이 마음을 울렸더이다."
"그대가 풍진을 어찌 안단 말인가?"
"불초 소녀 아직 인생을 종잡기는 어려우나, 가장 추운 날에 꽃을 준비하는 매화의 결의(潔意)를 익숙하게 보아온지라 신산(辛酸, 맵고 신 추위)이 무슨 의미인지는 짐작하고 있사옵니다."
"세상에 도(道)와 수행이 어찌 따로 있겠느냐. 너도 하나의 목숨을 받고 태어나 매화 줄기 하나에 너의 마음을 피워올렸음즉, 또한 기특한 꽃이 아니겠느냐?"
"망극하옵니다, 나으리."


그때 풀 먹인 안동포 같은 퇴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 너의 귀한 분(盆)과 더불어 함께 침실로 거두어 들이고자 하느니, 적적한 밤에 이 외로운 늙은이의 동무가 되어줄 수 있느냐?"
"거두어 주신다면 신명을 다 하겠사옵니다." <계속>


▶이전회차
[千日野話]이 매화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상국 편집부장 isi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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