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3)
정치적으로 난표봉박(鸞飄鳳泊)의 신세가 되어 떠돌고 있었고, 두 번씩이나 아내를 잃고 자식마저 먼저 보냈다. 정적들은 명망가 퇴계의 행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시절이라 삶 자체가 살얼음판이었다. 임지(任地)에 도착하자마자 단양 기민(饑民)에 관한 참담한 보고를 받았다. '우선 이 궁지(窮地)에서 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하자. 학문과 입신은 오로지 이런 일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마루 저쪽에 있는 화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뭐지? 못 보던 것인데…. 퇴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가보았다. 큼직한 단지 분(盆)에 고목의 형상을 한 노매(老梅)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굽이치는 나뭇가지에 처연한 백매(白梅) 예닐곱 송이가 매달려 있었다. 낙목한천(落木寒天)의 계절에 만난 매화. 그는 문득 턱 주저앉고 싶을 만큼 황홀해졌다. 자기도 모르게 가지 끝에 코를 가까이 대고 향기를 맡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니 온몸으로 꽃향기가 그윽히 번지는 듯했다.
몇 송이는 붉은 꽃받침 속에서 발을 오그린 아기처럼 눈을 뜨지 못했고, 두어 송이는 다섯 개의 둥그런 화엽(花葉)을 힘껏 벌리고 있었다. 마치 꽃 속에서 튀어나오려는 듯한 수십 개의 노란 꽃술이 저마다의 길이로 벋어나오며 하늘거렸다. 희고 가녀린 꽃술대의 그림자가 은은히 흰 꽃잎 위에 비치니 꽃잎도 떨고 꽃술도 떨어 마음이 흔들렸다. 작은 꽃송이 하나에 들어 있을망정, 화심(花心)은 뭇 인간의 터질 듯한 연정(戀情)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향기는 정녕 저 깊숙한 씨방에서 나오련만 꽃 전부가 농염한 마음이 되어서인지 꽃잎에서도 꽃술에서도 향기가 나는 듯했다. 너는 추위도 잊었느냐? 천하가 다 가지 속에 빛을 묻고 시절이 가기만 기다리는데 홀연히 살 떨리는 공기 속으로 촉수를 벋는 마음은 도대체 뭐냐?
그때 문득 퇴계가 환영에서 깬 듯 소리쳤다.
"여봐라, 누구 있느냐?"
"예, 나으리."
"이 분매가 어찌하여 여기에 와 있느냐? 어제도 없던 것이 제 발이 달려서 온 것은 아닐 터인데…. 누가 이런 것을 가져다 놓았단 말인가?"
"아, 예. 그러니까…."
대청 앞으로 달려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관원은 군수의 심기를 짐작해보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저어기, 우리 고을 관기 중에 두향(杜香)이란 년이 있사온데, 어제 소인에게 청을 넣어 굳이 이것을 거기에다 두기를 원하였기에…."
"관기? 내 부임한 뒤에 기생을 점고하는 일도 없앴고 이런저런 술자리에서도 아무도 부르지 않았거늘 어찌 그가 내게 이런 일을 하였을꼬?"
"나으리,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당장 거두겠습니다. 다만 그 아이가 하도 간곡하여…."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렇게 신기한 형상을 한 매화를 가꾼 것도 용하거니와 그걸 신임 사또에게 굳이 내놓은 까닭은 무엇일꼬?"
"그렇다면, 나으리. 관기 두향을 대령시킬까요?"
관원은 기회를 잡은 듯 빠르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퇴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내 백성의 물건을 무엇 하나라도 그저 받을 수 없으니, 그 아이더러 도로 가져가라 일러라."
"네, 알겠사옵니다."
관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깨를 주억거렸다.
이튿날 아침 퇴계는 대청에서 다시 다른 분매(盆梅)를 만났다. 이번엔 수줍어 볼이 터질 듯한 홍매였다. 어제의 매화는 말없이 등 뒤에 서 있는 조강지처 같더니, 오늘의 매화는 시담(詩談)을 나눌 듯 여유로운 해어화의 기운이 있었다. 하지만 도도하고 음전한 느낌이 여전하여 화사한 저고리 깃으로 드나드는 향기가 이율배반(二律背反)이었다. 아니, 어제 그렇게 말을 했건만 다시 매화를 가져다 놓다니…. 고을 원의 영(令)이 일개 기생에게도 서지 않는단 말인가?
"게 누구 있느냐?"
걱정스런 얼굴을 한 관원이 쪼르르 달려왔다.
'고집스런 년…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이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또의 책망을 받을 준비를 하고 머리를 조아린 그에게, 퇴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이상국 편집부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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