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왕에 뱉은 말, 하림은 그녀의 숙인 이마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날 밤, 나는 비로소 그의 진심을 확인했어요. 이런 말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그는 어쩌면 가장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인지도 몰라요.” 하림의 말이 끝나자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난 그의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요.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난.... 장선생님도 눈치 챘을지 모르지만 수관선생을 조금 좋아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그리고나서 잠시 생각에 젖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사실 그 일이 있고나서 운학 이장이랑 한번 만났어요. 내가 먼저 찾아갔어요. 그날 우리 아버지 땜에 최기룡에게 맞아 다친 것도 미안했고, 어쨌거나 고마운 일은 고마운 일이었으니까요. 그는 다친 이마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었는데 나를 보자 화들짝 놀라 일어났어요. 그리고 마치 장난질 치다 들킨 아이처럼 안절부절 못했어요. 그런 모습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죠. 어쩌면 그는 장선생님 말처럼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일지 몰라요. 하지만....” 하고 다시 말끝을 흐렸다.
하림의 어쩐지 이장과 만났을 때 그녀의 마음 한쪽이 흔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제멋대로 상상을 해보았다. 어쩌면 그러기를 조금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하림의 그런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 다시 조금 냉정해진 어조로 말했다.
“언젠가 <폭풍의 언덕> 이야기를 해주셨죠? 히스클리프와 캐스린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지독한 사랑 이야기.... ”
“.......”
“그날 밤 장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도 <폭풍의 언덕>을 읽었어요. 캐서린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사랑.... 끔찍한 사랑이죠. 그런데 내겐 그게 사랑이 아니라 차라리 중독성 강한 게임과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의 온갖 감정들, 이를테면 질투와 분노,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 좌절, 영원에 대한 헛된 도전.... 이런 모든 것들을 쏟아 넣고 벌이는 지독한 게임 말이예요.”
“게임....?”
“예.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카지노 중독자였는데 마침 자기 아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게임이 끝날 때까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게임에 몰두하였다는 거예요. 아니, 어쩌면 바깥 세상에서 벌어진 불행이 그를 더욱 더 게임에 몰두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죠. 난 잘 모르지만 사랑에 눈 먼 사람도 마찬가질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림은 그녀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의 사랑이 그렇다는 말이군요.”
“불행히도 나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또 그럴 마음도 없어요.” 그녀는 대답 대신 마치 자기 스스로에게 다짐이나 하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지으며 결론이라도 짓듯 덧붙였다.
“게임은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죠.”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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