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에 거리를 걸으면 길옆 은행나무의 잎들이 가로등보다 더 눈부시다. 저 나무는 수억년 전부터 그렇게 이 땅을 굽어보며 지구를 지켜왔을 것이다. '화석나무'로 불리는 은행나무를 보면서 새삼 유구한 생물의 역사를, 장구한 지구의 역사를 생각한다. 46억년이라고 하는 지구의 나이를 생각할 때 인간은 마지막 순간에 태어난 한 점의 티끌, 한 미물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먼지 같은 피조물이라는 점에 인간은 역설적으로 그 존귀함이 있다. 결국 지구의 수십억년의 시간은 지금의 '나'를 위해 존재했던 시간이 아니겠는가. "만물이 모두 내 안에 갖춰져 있다"는 맹자의 선언처럼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해 수억년 동안 은행나무는 잎을 부지런히 피우고 물들고 졌다가 다시 피어났던 것이 아닌가. 은행나무 아래서 귀하디 귀한 인간의 존엄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존귀한 존재들의 삶은 또한 얼마나 위태롭고 남루한 것인가. 아니 얼마나 스스로를 비루하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 내일은 그 비루함을 다시금 생각게 하는 날이다. 바로 큰 나무로 자라나야 할 씨앗들을 비정한 시험에 들게 하는 날인 것이다.
그 시험은 단 하루의 승부로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결정짓는 것이다. 그건 그 어떤 벤처보다 더 위험한 벤처이며, 어떤 정글보다 더한 험로이며, 어떤 덫보다 더 아찔한 함정이다. 내일은 그 함정을 빠져나오는 극소수의 승리자, 그리고 절대 다수의 패배자로 나누는 날이다. 많은 아이들이 날개를 펴기도 전에 꺾이는 날이며, 항해를 떠나기도 전에 좌초하게 하는 날이다.
'수학능력'은 원래 무엇인가.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능력(修學)이 됐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한 기능에 불과한 '수학(數學)' 실력 등을 측정하는 것으로 협소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협애한 측정치로 사회가 편성해 놓은 열과 오에 편성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제2의 신분'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니 이는 사회가 쳐 놓은 보이지 않는 감옥의 죄수가 되는 '수학(囚學)'이라고 해야 할 법하다.
그 감옥을 벗어나게 하는 것, 그건 내일의 시험을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의 시험으로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가능해진다. 먹줄로써 아이들을 자르고 베어내며 짜 맞추는 가혹행위, 배움의 이름으로 가혹행위를 수십년째 강요하고 있음을 어른들이 절실히 반성해야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내일은 어른들의 수학능력 시험의 날, 부끄러움을 아는지를 배우는 '수학(羞學)능력시험'의 날이어야 할 것이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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