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지성이었던 이제현의 문집 '역옹패설(?翁稗說)'은 고려시대의 3대 비평문학서로 꼽히는 책이다. 평소에 궁금했던 것은 제목의 뜻이었는데, 지은이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곡식 중의 가장 비천한 것이 피, 즉 '패(稗)'인 것처럼 늙은이의 잡문이어서 패설이라고 붙였다고 말한다. 그럼 역옹은 무엇인가. 이는 이제현이 스스로 지은 자신의 호인데 그는 왜 도토리 나무 '력(?)' 자를 빌어 호를 땄을까.
"이 '력' 자는 즐거울 락 자를 몸으로 한 것이다. 도토리나무는 재목으로 쓰기에는 좋은 것이 못 되기 때문에 베어 쓰는 해를 입지 않는다. 이것이 나무에게는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도토리 력 자는 즐거울 락 자와 같다."
그는 벼슬길을 그만두고 혼자 수양하며 호를 역옹이라 지었다면서 자신은 도토리나무와 마찬가지로 재목감이 못 되니 오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뜻이라고 들려준다.
이제현의 역옹에 관한 얘기를 읽으면서 자연계와 생물을 빌어 품은 바를 펼치는 우리 선인들의 운치, 그리고 그 운치 이상의 지혜와 정연한 내면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자연과의 합일, 물아일체로 세상을 바라봤던 선인들은 이처럼 늘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취하려 애썼다.
바야흐로 사람들이 '자연'으로 들어가기에 좋은 때다. 오랜 광합성의 노동을 끝내고 나무들이 스스로를 단풍으로 치장하고 있는 지금 나라 곳곳의 산들은 주말이면 단풍보다 더 화사한 옷차림을 한 나들이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산을 오르면서, 그 고운 단풍들을 보면서 한반도는 참으로 축복을 받은 땅임을 느낀다. 사실 한반도가 매우 특별한 기운을 갖고 있음을 들려주는 얘기들도 듣는다. 예컨대 한반도는 약초의 종류가 다양하기로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그 같은 생태의 보고가 된 것은 한반도라는 땅에 뭔가 특별한 기운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경이감을 자아낸다. 그러니 우리가 설악산에서, 지리산에서 단풍을 즐기며 우리네 삶도 그처럼 울긋불긋해지기를 바랄 때, 그런 마음 한 켠에서 자신이 이처럼 비범한 땅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는 인사라도 드려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감사의 마음 한편에 스스로 분발심까지 느낀다면 더욱 좋겠다. 세계 어디에도 내 놓을 수 있는 우리의 금수강산, 이 자랑스런 자연과 산천에 부끄럽지 않은 나라,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되겠다는 생각을 한번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금수만도 못한' 사람, 금수만도 못한 나라가 돼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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