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노량진에 터잡은 24시간 '수산물 1번지'
[아시아경제 이혜영 기자]귓전을 때리는 열차 소리. 그러나 그보다 강한 생선, 그리고 바다의 내음.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을 나서면 눈보다 코가 먼저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준다. 바로 서울 속의 바다, 노량진수산시장이다.
지난 11일 찾은 이곳에는 제철을 맞은 전어부터 각종 활어와 새우, 대게, 전복 등 바다에서 난 모든 것들이 모여 있었다. 다른 어디서도 보기 힘들 '살아있는 기절낙지'가 있는가 하면 '동태포 꽃'도 피어 있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역 옆에 위치한 노량진수산시장은 팔딱대는 생선들처럼 24시간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곳이다. 새벽, 시끌벅적한 경매를 시작으로 이곳의 하루가 시작된다. 서울의 어느 곳보다 일찍 새벽이 열리는 곳이다.
밤을 달려 서울로 상경한 전국의 수산물은 경매장에서 새로운 주인을 만난다. 새벽 내내 경매사와 도매상의 한판 난장이 벌어지고 나면 845개에 달하는 상점들은 하루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365일 쉬지 않고 새벽 공기를 가르며 물건을 떼러 오는 소매상과 식당 주인들이 지나가고 나면 서울의 명소를 구경하러 온 관광객과 식탁에 올릴 반찬거리를 찾는 주부들이 뒤를 잇는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싱싱한 안주를 벗 삼아 술자리를 하러 온 직장인들이 또 이곳을 시끌벅적하게 채운다.
조선 경강시장이 뿌리..옛부터 '연결지' 역할
1905년 첫 수산물시장 경성수산시장 들어서
노량진(鷺梁津)은 원래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을 가졌다. 봄이 오면 이 곳 노량진을 찾아 노닐다 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떠나는 백로의 땅. 어쩌면 오래 전부터 사람과 물자가 들고 나는 것은 노량진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량진수산시장과 연결된 노량진역은 얽히고 설킨 서울 지하철의 노선도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다. 가장 나이 많은 1호선과 가장 어린 9호선이 함께 이곳을 지나쳐 간다. 그 풍경이 고시촌의 젊은이들과 수산시장 터줏대감 상인들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서울의 중심부에 자리한 탓에 노량진은 과거부터 중간 연결지의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정부가 운영하던 시장인 시전(市廛) 어물전에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경강(지금의 한강) 근처의 포구들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노량진도 그 중의 하나였다. 경강시장은 구한말 인천의 제물포항이 개항하고 1899년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노량진수산시장 바로 옆을 지나는, 가장 오래된 한강철교가 그 시절의 영광을 말해주고 있다.
철도가 개통되고 6년 후인 1905년 서울에는 최초의 수산물 도매시장인 경성수산시장이 들어선다. 지금의 서울역 앞에 자리를 잡았던 수산시장이 노량진으로 옮긴 것은 1971년. 어느덧 노량진수산시장의 나이도 마흔 살을 넘어섰다. 중년의 나이를 먹으면서 시장은 곳곳에 주름살이 생겨났다. 말끔하던 시장 곳곳도 여기저기 칠이 벗겨졌다.
2년 뒤엔 시장 리모델링..
질척하고 고된 일상풍경 '비릿한 이야기'도 사라질까
이제 이 시장에도 '현대화'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2002년에 이곳을 인수한 수협중앙회는 '낡고 오래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량진수산시장을 현대식으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하2층, 지상6층 규모(대지면적 4만214㎡, 연면적 11만8346㎡)에 총 사업비 2024억원이 투입되는 대규모 공사가 지금의 시장 바로 옆 터에서 한창 진행 중이다. 공정률은 9월8일 현재 16.4%.
2015년 8월이면 노량진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곳으로의 이주를 2년여 앞둔 시장 상인들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불안감이 교차한다. 시장 한 켠에서는 현대화사업 단계의 일환으로 내부에 가건물을 세우는 작업이 한창이다. 그 바로 앞에서 상인들과 공사현장 관계자 간에 격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20년 가까이 이 곳에서 장사를 해 온 50대 여성 박모씨는 "추석 대목을 앞두고도 일본 방사능 여파로 손님들 발길이 끊어지면서 매출도 크게 줄었는데 내부공사까지 진행돼 더 힘들다"고 말했다. 공사현장과 마주보고 있는 곳의 상인들이 추석연휴가 끝나면 공사를 시작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기계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상인들은 새 건물로 이사 후 오르게 될 임대료도 걱정이다. 현대화된 시설을 이용하는 만큼 당연히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겠지만 그만큼 많은 손님이 찾아올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3년마다 있는 자리 추첨 풍경도 사라질 수 있다. 상인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3년을 주기로 업종별로 점포 자리를 재배치하고 있지만 '재래시장'이 '현대식 시장'으로 바뀌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비교적 안쪽에 자리해 눈길이 별로 닿지 않는 곳에 위치한 한 점포의 주인은 "작년에 자리추첨을 해서 재추첨이 있는 2015년만 바라보고 있는데 새 건물로 옮기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30대에 이 시장에 들어와 이제 자식에게 점포를 물려줄 계획을 갖고 있는 60대의 이모씨는 "걱정되는 부분도 있지만 오래되고 낡은 가게를 자식에게 주는 것보다는 깨끗하고 좋은 곳을 물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엇갈리는 상인들의 마음만큼 손님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갓난쟁이 손녀 딸을 안고 제수용품을 사러 온 노부부는 "애들을 데려오기에는 칙칙하고 환경이 좋지 않아 깨끗한 곳으로 옮겨가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홍콩에서 온 관광객들은 "서울의 다른 곳들을 다닐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이색적"이라면서도 "바닥이 너무 젖어 있고 쉴 공간도 없어 오랫동안 둘러보기에는 좀 불편하다"고 답했다.
회식을 위해 이 곳을 찾은 김의진(41)씨는 "노량진수산시장을 찾는 이유가 가끔 옛날 느낌을 가져볼 수 있다는 점인데 아쉽다"면서 "서울에도 이런 곳이 남아 있어야 사람사는 냄새가 좀 나지 않겠냐"고 서운함을 나타냈다.
이 시장을 지켜온 상인들, 그리고 이곳을 찾는 서울시민들은 다만 바랄 뿐이다. 낡고 허름한 건물이든 번듯한 현대식 건물이든 노량진수산시장이 늘 바다 내음, 그리고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장으로 남아 있기를. 아마도 이 시장의 또다른 가족인 물고기들조차 그러지 않을까 싶다.
이혜영 기자 itsm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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