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서울 시선집중 시리즈 53. 선정릉~봉은사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서울 강남구 삼성동은 늘 사람으로 북적인다. 코엑스(COEX) 건물 하나만도 상주 인원이 2만명, 유동인원이 하루 15만명에 달할 정도다. 거리에는 전신이 유리로 뒤덮인 현대식 빌딩들이 양 옆으로 늘어서 있다.
하지만 이 대도시 한복판에 고층빌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09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중 3기가 강남 중심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제 9대 임금인 성종, 그의 계비인 정현왕후, 둘의 아들인 중종의 능이 있는 '선정릉(宣靖陵)'이다. 28일 찾은 선정릉은 돌담을 경계로 도심의 빌딩 숲과 구분돼 마치 '녹색 섬'처럼 보였다.
선릉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죽 늘어서 있는 은행나무, 소나무 숲길을 지나면 이내 홍살문을 마주하게 된다. 홍살문 밑에 정자각까지 들어가는 돌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왼쪽이 오른쪽보다 조금 더 높고, 더 넓다. 왼쪽은 신도(神道), 오른쪽은 어도(御道)다. 신도는 죽은 자의 길, 어도는 산 자의 길이다. 무덤의 주인이 제례를 지내러 온 자손을 맞이하러 나오는 신도가 자손들의 길인 어도보다 위에 있고, 폭도 넓다. 이 경계는 제례를 지내는 정자각의 계단까지 이어진다. 계단 역시 좌측의 신계(神階), 우측의 어계(御階)로 나뉘어 정자각의 문 앞에서 두 길이 만난다. 산자와 죽은 자가 함께 마주한 정자각 문 너머로 초록빛 능선과 각종 석축이 어우러진 왕릉이 올려다 보인다.
한낮의 햇빛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왕릉은 아주 평화로운 길지(吉地)로 보이지만 조선왕릉 중에 가장 심한 수난을 당한 곳이 바로 이 선정릉 3기의 무덤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을 습격해 무덤을 모두 파헤치고 재실까지 불에 타는 참변을 겪었다. 특히 중종의 정릉은 그 운명이 기구했다. 중종은 사망한 후에 애초에 고양의 서삼릉(西三陵))에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와 합장돼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계비이자 '철의 여인'으로 정국을 호령했던 문정왕후가 사후에 함께 묻힐 욕심에 남편을 지금의 정릉으로 이장했다. 문정왕후의 소원은 하지만 강남지역의 고질적인 침수 문제가 제기되면서 이뤄지지 못했다. 결국 문정왕후는 남편과 떨어져 지금의 태릉선수촌이 있는 태릉(泰陵)에 홀로 안장됐고, 애꿎게도 중종 역시 외로운 처지가 돼야 했다. 조선왕릉 중 왕만 홀로 있는 단릉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과 태조의 건원릉 외에는 이 정릉이 유일하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야기를 뒤로하고 선정릉에서 동쪽으로 1.5㎞ 정도 빌딩 숲을 헤치고 걸어가면 선정릉의 호위사찰인 봉은사(奉恩寺)를 만나게 된다. 코엑스 건물과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로 마주한 봉은사는 일주문부터가 다른 사찰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보통은 사찰이 있는 산 이름과 절 이름이 현판에 걸리기 마련인 일주문에는 진여문(眞如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모든 사물의 본모습을 파악하고 절대 진리의 길로 나아가라는 의미다. 이런 현판이 걸리게 된 것은 이곳이 조선시대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승과(僧科)가 실시되던 시험장이었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정릉의 호위사찰로 봉은사(奉恩寺)를 크게 중창한 뒤 보우(普雨)대사를 통해 승과를 실시했다. 개국 이래 억불 정책에 의해 크게 위축됐다가 문정왕후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만나 한때 중흥의 계기를 맞았던 조선불교의 부침이 이 현판, 그리고 봉은사에서 엿보인다.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불교 중흥의 꿈은 좌절되지만 봉은사에서 치러진 승과시험으로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배출됐으니 봉은사는 그것만으로도 조선불교에 큰 기여를 했던 셈이다. 당시 시험장으로 쓰였던 선불당(選佛堂)은 아직도 스님들의 공부방으로 쓰이고 있다.
사실 봉은사의 현판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진여문 현판이 아닌 불교 경전들의 경판이 모셔진 판전(板殿) 현판이다. 판전 글씨 옆에는 '七十一果病中作'(나이 칠십에 병중에 쓰다) 이란 낙관이 남아 있는데, 추사 김정희가 죽기 사흘 전 쓴 최후의 걸작이다. 도저히 병중의 사람이 쓴 것으로 보이지 않는 힘 있는 필체다.
이곳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사방에 향내가 퍼지고 대웅전 아래에는 생전에 이 절에 다녔던 한 신도의 49재를 위해 극락왕생을 비는 흰색 유등이 달려있었다. 대웅전 앞에 놓인 제단 앞에 사람들이 오고가며 쌀과 콩 등 곡식을 시주하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최고 권력자들의 살아 생전 야망과 애증, 그리고 죽은 후에까지 이어진 질긴 인연을 간직한 채 이제 선정릉과 봉은사는 도심 속의 녹지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각각 삼릉공원과 봉은사 역사공원이란 이름의 도심 속 녹지 공원으로 모두의 휴식공간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속세와 단절된 듯하면서 도심의 한 일부가 돼 있고, 죽은 자들의 공간이면서도 산 이들의 휴식을 위해 소나무 숲을 내어 주는 곳, 성속(聖俗)과 생사(生死)가 공존하는 곳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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