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서울 시선집중 시리즈 48. 종로 극장가
[아시아경제 김지은 기자]
해방 후 서부극으로 근대화 이끈 단성사
피카디리·서울극장 멀티플렉스 변신 속
복합상가로 제2 榮華 꿈꿨지만 끝내 철거
전통과 현재가 공존하는 종로. 대로 좌우엔 보신각, 탑골공원 사이사이로 대로 각종 업체들이 입점한 상가 건물들이 즐비하다. 지난 3일 오후 내려쬐는 햇볕 아래로 부채질을 하거나 양산을 든 남녀노소가 분주하게 오간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영화관'을 찾아 종로3가로 향한다. 종로3가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지금까지 '극장가'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거리다. 그러나 극장가 종로3가를 지켜온 영화관들 중에서도 특히 익숙한 이름, '단성사'는 지금 그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단성사의 흥망과 성쇠는 종로3가의 역사, 한국 영화관의 역사, 한국사회 현대사의 한 역사다.
오랫동안 대한민국 대표 극장으로 군림해온 종로의 극장들은 1990년대 중반 거센 파도를 만났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등장해 확대되면서 단성사와 인근 극장들은 한 순간 내리막길로 들어서야 했다. 사람들은 최신 시설을 갖추고 쇼핑, 먹거리, 오락까지 한 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멀티플렉스로 향했다.
특히 단성사는 그 영광이 찬란했던 만큼 '몰락'이 애처로웠다. 2000년대 들어 대한극장, 피카디리, 서울극장 들이 리모델링 해 재개관을 했듯이, 단성사도 복합 상가로 리모델링되면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경영난으로 인해 2008년 부도 처리되고 말았다. 한 업체에 의해 인수됐지만 오세훈 전 시장 때 서울시가 추진한 귀금속 산업 뉴타운의 종합 지원시설을 유치하려다 무산돼 결국 공매 절차에 들어간 상황이다. 지금 단성사 건물은 '단성사'란 간판도 없고, 건물 입구도 열려있지 않은 채 건물 둘레가 모두 철제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출입이 통제된 텅빈 극장이 돼버렸다.
그 전까지 오랫동안 단성사의 위치는 확고했다. 50~6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미국 서부극을 보러 단성사에 온 경험을 지닌 이들이 있을 것이다. 단성사는 맞은편에 위치한 '피카디리', 그리고 퇴계로에 위치한 '대한극장'과 함께 종로~충무로 지역에 극장벨트를 형성했다. 특히 단성사 뒷골목엔 기생들이 많은 홍등가와 유흥가도 밀집해 있었다. '주먹'들도 그때의 영화(榮華)에 한몫했다. 단성사에서 특히 액션영화가 많이 상영되고 인기도 높았던 것은 이 '주먹' 관객들 때문이라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단성사의 영광의 절정은 몇 편의 영화로 상징된다. 그 중 1977년에 내걸린'겨울여자'는 한국영화 흥행사의 한 획을 그었다. 김호선 감독이 연출하고 당대 최고의 배우인 신성일과 신인 여배우였지만 이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장미희가 열연한 영화였다. 내용도 순수하고 어린 여자 '이화'가 남자들을 거치면서 기성의 그릇된 윤리관과 육체적 속박에서 점차 벗어나 해방된다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 영화는 단성사 개봉에서만 58만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 영화를 계기로 70년대 들어 심해진 정부의 감시와 통제, 그리고 TV의 인기로 관객을 뺏긴 영화계는 다시 옛 영광을 되찾기 시작했다. 감독과 배우 외에 극장의 또 다른 주역은 바로 영화 간판 그림을 그리던 '간판화가'였다. 서울 시내 주요 극장에서 영화 간판을 그리던 이들은 대학에 가기엔 형편이 어렵지만 그림을 잘 그리던 화가 지망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문하생을 둘 정도로 잘 나가던 그들은 그림도 그리고 돈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직업이었다. 대한극장은 공채 시험을 개최해서 전국에서 모인 지원자들을 심사해 간판화가를 뽑았을 정도라고 한다. 극장 간판이 영화홍보를 좌지우지 하던 그 시절에는 인기배우들도 간판화가들을 찾아와 자신의 얼굴을 더 크게 그리거나 더 비중있게 그려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 당시 종로3가를 찾아 종종 영화를 봤다는 김기현(60)씨는 "골목과 가게 창문이나 내부엔 영화 포스터들이 많이 붙어 있었다. 가게 주인들은 포스터를 붙여주는 대신 영화표를 무료로 받았고, 돈 없는 학생들은 이 무료표를 정가보다 싸게 사서 영화를 보곤 했다"라고 추억을 더듬었다. 지금은 실크스크린 사진이 영화 홍보 간판과 포스터를 대체했고, 물론 극장의 간판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단성사는 일제시대 때부터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 했다. 단성사는 한일 강제병합 3년전인 1907년 지명근 등 한국인 3명의 발기로 설립됐다. '단결하여 뜻을 이루자'라는 단성사(團成社)의 의미에서 설립자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설립 당시 단성사는 주로 퇴물 기생들의 공연장으로 활용돼 판소리, 서양 노래, 만담, 모창 등이 공연되어 사람들을 끌었다. 그리고 1917년 '박승필'이라는 인물이 단성사를 인수, 영화전용관으로 개축해 문을 열면서 단성사는 영화와 첫 인연을 맺었다. 수완이 뛰어난 기획, 연출자였던 박승필은 단성사 이전에 광무대라는 극장을 열어 전국의 명창들을 불러모아 공연을 펼쳤던 인물이다. 1918년부터 1932년까지 단성사는 식민지 조선영화의 중심이었다.
1930년대 들어 더 나은 시설을 갖춘 일본인들의 극장에 밀리는 수난을 겪었던 단성사는 해방과 6ㆍ25전쟁도 견뎌내면서 건재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전쟁보다 더 무서운 세태의 변화라는 파고를 넘지는 못했다.
단성사 맞은편, 롯데시네마가 인수해 '롯데시네마 피카디리'로 이름을 바꾼 극장에 영화를 보러 왔다는 한 60대 여성은 "동창들과 만날 때 종로3가에서 영화를 보곤 하는데 추억할 거리가 없어서 아쉽다. 옛날 모습을 보전하는 게 좋은데 그런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은 기자 muse86i@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