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당한 사랑은 분노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배신당한 여자의 사랑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게 한다지만, 배신당한 수컷의 사랑은 오뉴월 서리 정도가 아니라 끔직한 칼부림으로 이어지는 게 흔한 세상이었다. 가지지 못할 바에야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수컷의 이기적 사랑법인지도 모른다. 수컷들의 전쟁에서 밀려난 수컷 물개들이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교미를 마치고 나오는 암컷 물개를 집단으로 물어죽이는 장면을 보면 그것은 비단 인간의 세계만 그런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둠 속의 빛처럼 나타났던 여자로부터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운학이 미쳐 날뛰는 것도 하등 이상할 바가 없었다. 운학은 머리칼을 날리며 미친 사람처럼 어두운 허공을 향해 계속해서 떠들어대었다.
“나를 이용한 쪽은 오히려 남경희 그녀야! 나도 오늘 비로소 그걸 알게 되었어. 그녀는 나를 이용해 송사장 무리의 개발을 막고, 자기들 기도원을 세우려고 했던거야! 흥, 고상한 척 하지만 그녀의 아버진 베트남에서 여자를 강간하고 죽였어! 그리곤 전역을 하곤 난 후, 경찰이 되어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을 했지. 그는 악질적인 고문 기술자였어! 난 다 알아.”
어둠 속에서 악귀가 날뛰듯 바람이 불었다.
“그의 손엔 피가 묻어 있고, 그의 아마엔 그녀 말대로 카인의 낙인이 찍혀 있지. 이제 와서 회개를 한다구? 흥. 안 돼! 내가 하느님이라 해도 그런 자를 용서치 않을 거야! 두더지처럼 이곳으로 숨어 들어와서 평화를 얻겠다구? 흥. 누구 좋아라구!”
그는 마치 자기 눈앞에 영감이 서있는 것처럼 소리쳤다. 그러다가 그는 곧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서,
“하지만.....”
하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하지만 난 그녀를 사랑해. 그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든, 그녀가 뭐라 하건 상관없어. 날 이용한대도 상관없어. 아니, 날 죽여도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장하림, 부디 당신은 그녀에게 다가가지마. 당신한테는 얼마든지 기회가 있잖아? 그녀의 마음만은 흔들어놓지 말아줘. 응? 부탁이야.”
그는 숫제 애원이라도 하는 포즈를 지었다.
하림은 그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들으면 진심인 것 같기도 했지만 다시 어떻게 들으면 마치 연극 속 대사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바람 부는 밤, 초승달만 높이 하늘에 박혀있는 저수지 둑길 풍경 그 자체가 연극 무대처럼 느껴졌다. 하림은 마치 불쾌하고 거대한 심리극 속에라도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운학은 어쩌면 천부적인 배우의 끼를 타고 난 사람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오해요.”
하림은 끓어오르는 불유쾌한 감정을 억누르며 냉정하게 말했다.
“난 이장님이 누구를 좋아 하건 않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오. 그리고 그녀와 나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 난 이장님이 언제부터 우리를 미행해왔는지 알지 못하지만, 내가 오해받을만한 일을 했다곤 생각지 않아요. 그녀는 아침에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하기 위해 찾아왔고, 그리고 밤이 늦어 혼자 보내기가 뭣하여 데리다 주고 온 것 밖에는 없어요.”
“흥! 그것 밖에 없다구?”
하림이 말을 마치자 그는 다시 분노에 찬 목소리로 돌아와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글. 김영현/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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