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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9장 어둠 속의 두 그림자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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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9장 어둠 속의 두 그림자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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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해일 뿐이었다.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봐도 남경희랑 자기 사이에 추호도 그런 오해를 살 만한 아무런 꺼리가 없었다. 그녀는 단지 아침에 개 죽은 일로 사단이 벌어져 윤여사 고모할머니에게서 년짜 소리까지 들어가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을 때, 그저 구원병처럼 나타나 한 마디 해 주고 간 하림이 고마워서 포도주 한 병 사서들고 인사차 왔다 간 것 뿐이었다. 그 일은 이장 운학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의 아버지, 이층 집 영감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감이 젊은 시절 베트남전에 갔다 왔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곳에서 모종의 추악한 사건에 연루되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 그리고 아주 먼 훗날 늙어서 다시 그곳을 방문하였고, 그 자리에서 <한국군 증오비>라는 것을 보고 카인의 이마에 찍힌 화인 같은 죄악이 자기를 따라다니고 있음을 알았다는 이야기, 그 역시 고엽제 피해자로서 회개자로 교회에 열심히 다녀 장로까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교회 목사와 세습 문제로 다투다가 불을 지르고 쫓겨났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런 아버지와 자신의 소망을 담아 이곳 살구골에 <인자의 머리 둘 곳>이라는 이름의 기도원을 짓고 싶다는 이야기....


대충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어떻게 보자면 매우 사무적인 분위기였고, 딱딱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추호도 남녀, 뭐 어떻고 하는 그런 감정이나 운학의 오해를 살만한 그런 꺼리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하림은 처음부터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에겐 기다리는 혜경이 있었고, 소연이 있었다.
차라리 그가 하림과 소연이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다면.....?

그건 그랬다.
그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고,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당장 동네에서 쫓겨난대도 달게 감수해야할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소연은 그들의 관심 밖인지도 몰랐다. 그녀 말대로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 없었을지 모른다.
이상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갑자기 그때 그 순간 소연이 보고 싶었다. 예전엔 이런 경우 의례히 혜경의 얼굴이 떠올랐으련만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혜경의 얼굴은 희미해지는데 그 자리에 어느새 자꾸 노랑머리 소연의 모습이 비집고 들어왔던 것이다.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사라진다, 는 말 그대로였다. 그릇과 여자는 내놓으면 깨진다는 속담이 남자라고 통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하림은 혼자 그런 엉뚱한 생각, 저런 요상한 생각, 떠오르는 대로 생각하며 운학의 뒤를 멀찌감치 아무 말없이 뒤따라 걸어갔다. 운학은 여전히 절룩거리며 저만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사방은 쥐 죽은 듯 조용하였고, 초승달 그림자만 깊게 밴 밤 저수지에선 가끔 무엇이 떨어지는지 풍덩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가 곧 잠잠해졌다. 윙윙거리던 바람소리만 아직도 가끔 생각난 듯이 을씨년스럽게 불어오고 있었다.
갈 때는 금세였는데 돌아오는 길은 꽤나 멀게 느껴졌다. 아마 운학의 느린 발걸음 탓인지도 몰랐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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