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한경희생활과학 한경희 대표
한경희 대표 "바빠도 초등생 자녀는 직접 돌봤죠"
슈슈다리미 보고 스팀청소기 창안...직원이 멘토, 행복한 회사가 목표
[아시아경제 이은정 기자] 불과 3년밖에 안됐다. 월스트리트저널과 포브스아시아에서 주목할 파워 여성 기업인으로 꼽았지만 CEO란 명함 외의 변변한 외부 직함은 없다. 인지도와는 달리 회사 설립 이후 12여년간 외부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회사와 집만 오가는 은둔 경영(?)을 한 탓이다. 오죽했으면 업계에서조차 그를 '유명한 것과 달리 생전 얼굴을 볼 수 없는 경영인'이라고 평가했을까. 개인적인 외부활동을 시작한지 이제 3년차라며 살포시 웃는 주인공은 바로 한경희생활과학의 한경희 대표다.
"적어도 자녀가 초등학교를 다닐때 까지는 직접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극성스러운 엄마여서가 아니라 그 시기엔 꼭 엄마가 필요하다는 개인적인 신념 때문이었죠.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면서 재워주는 원칙을 꼭 지켰습니다. 이제 중학생이 된 이후론 같이 늦어요. (저도) 조금씩 외부활동을 시작하고 있죠."
의외였다. 한경희생활과학을 삼성ㆍLG전자에 이은 제 3의 브랜드로 키워낸 그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일 중독자'일 것으로 생각했다. 가뜩이나 남성전유물에 가까운 굴뚝산업인 가전 제조업체의 대표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도 자식 때문에 울고 웃는 영락없는 우리네 '엄마'였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5급 공무원이란 안정적인 직장을 기반으로 비교적 손쉽게 엄마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그가 굳이 창업이란 고난의 길을 자처한 이유가. 그의 목소리엔 점점 힘이 들어갔다.
◆슈슈 다리미와 스팀청소기
공단 이미지를 벗고 구로디지털단지와 함께 G밸리로 새롭게 거듭났다는 가산디지털단지 내 자리잡은 한경희 생활과학. 첨단 빌딩 숲 사이에서도 한눈에 쏙 들어올 정도의 첨단 사옥일 것이란 기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빌딩 숲의 가산디지털 단지역에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경희 생활과학은 디지털 이미지와는 딴 판이었다. 낡은 공장동과 사무실동, 전시관 등으로 이뤄진 사옥에선 첨단보다는 되레 옛 구로공단의 역사가 느껴졌다. 한 대표는 "IT벤처가 아니라 3D 산업 중의 하나인 굴뚝, 제조업체다 보니 아직 공단 느낌이 강한 편"이라며 "창업 당시에 IT벤처 붐이 불어 혹시하며 기대를 했지만 역시였다"고 말했다. 낡은 외관 자체가 3대 가전 브랜드가 되기까지 겪었던 숱한 시련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던 셈이다.
첫 시련은 창업 전 부터였다. 사실 오늘날 '한경희' 브랜드를 키워낸 스팀청소기의 개발 계기는 걸레질이 싫어서였다. 두 아이 엄마로서 직장과 집안일을 병행한다는 게 당시 공무원이었던 한 대표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특히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하는 걸레질이 제일 힘들었다.
걸레질이 우리나라 여성들의 타고난 원죄인가 보다며 투덜거렸던 그의 인생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플라스틱 소재의 스팀다리미인 '슈슈다리미'를 본 1999년였다. 그는 "슈슈다리미에 막대봉을 꽂으면 스팀청소기가 되겠구나, 생각하고 대뜸 사업에 뛰어들었다"며 "꼭 필요한 제품을 만들어 우리나라 주부들을 걸레질에서 해방시켜야 겠다는 신념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개발부터 만만찮았다. 바닥청소를 하기 위해서는 다리미 보다 스팀의 양이 많아야 했고, 일정한 스팀을 꾸준히 배출하는 기술도 필요했다. 스팀다리미에 봉을 꽂으면 완성되는 그저 그런 제품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제품을 개발해야 했던 것이다.
유통도 문제였다. 꼭 필요한 제품이니 개발만 하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갈 것으로 자신했지만 착각이었다. 그러다보니 5000만원이면 충분할 줄 알았던 사업 자금은 어느 순간 8억원을 넘었다. 그가 예비창업자들에게 '창업 전 그 분야의 영업을 최소 2~3년을 한 이후 뛰어들어라'고 조언하는 것도 이같은 경험에서 비롯됐다.
정부 자금을 지원받기도 쉽지 않았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ITㆍ하이테크놀로지 분야로 자금 지원이 집중된 데다 여성 경영인에 대한 편견도 심했다.
"창업 초기 정부 지원자금을 신청했더니 평가하러 온 컨설턴드가 '당신 남편이 무슨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당신이 바지사장을 하느냐'며 다그친 적이 있어요. 당시는 여성 경영인이 정말 자리잡기 힘든 문화였죠. 매일 이러다간 길 바닥에 나 앉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CEO의 멘토가 되어 준 직원, 직원이 행복한 회사가 되길 꿈꾸는 CEO
포기하려는 그녀에게 힘을 준 이는 직원들이었다. 연구ㆍ개발 부서는 물론 전 직원이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냈다. 유통 마케팅 직원들은 대형마트 양판점 등을 뛰어다니며 유통망을 뚫었다. 이들은 사업 자금이 부족해 4년2개월간 월급을 제 날짜에 주지 못했지만 기다려줬다.
다행히 스팀청소기에 대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이는 홈쇼핑 진출로 이어졌다. 반신반의했던 첫 방송 후 구매는 폭발했다. '관절염에 걸레 청소를 못했는데 고맙다', '엄마한테 선물하고 칭찬받았다'는 고객들의 편지가 이어졌고 이는 자연스럽게 브랜드 가치로 연결됐다. 이제는 '한경희'란 브랜드만 믿고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든든한 멘토였던 직원들 덕분에 포기하지 않은 결과다.
"꿈을 갖고 자기가 도전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끝까지 해야 합니다. 끝까지 제대로 준비해서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한 대표의 다음 목표는 2020년까지 전 세계 최고의 가정생활용품 회사로 제 2의 도약을 하는 것이다. 최근 자세교정 책걸상 시스템 '백솔루션(Back Solution)'을 내놓는 등 제품군을 확대하고 있는 것도 이 비전에 따른 것이다. 올 들어 가두 매장을 확대하는 것도 같은 배경이다. 현재 한경희생활과학의 가두 매장은 40여개로, 연말쯤이면 60곳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는 "브랜드에 걸맞은 좋은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들이 행복해지길 바란다"며 "빠르면 올 연말께 그동안 상상도 못했던 제품으로 소비자들의 삶을 혁신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밝혔다. 상상도 못했던 제품이 와 닿지 않는다고 했더니 "주방에서 쓰는 제품이란 사실만 밝힐 수 있다. 3~4년을 상상했던 제품인데 작년에 기술적 해결책을 찾았다. 깜짝 놀랄 것"이라고만 답했다.
한 대표의 또 다른 꿈은 직원들의 행복이다.
"저한테 가장 큰 고객은 직원들입니다.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행복한, 성공한' 사람들이 모인 회사를 만드는 게 꿈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해야죠."
◆한경희 대표는?
▲1964년 서울 출생 ▲1982년 대화여고 졸업 ▲1986년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1986∼1988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근무 ▲199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경영대학원(MBA) 마케팅 석사▲1997∼1999년 교육부 교육행정사무관 ▲1999년∼현재 한경희생활과학 대표 ▲2005년 발명의 날 대통령 표창 ▲2008년 월스트리트저널 주목할 만한 여성 기업인 50인 ▲2012년 포브스 아시아 '아시아 파워 여성기업인 50인' 선정
※한경희생활과학은 어떤 곳?
한경희생활과학은 스팀청소기와 스팀다리미 등 '스팀' 가전제품으로 유명한 중견기업이다.
1999년 회사 설립 후 2001년 첫 번째 바닥청소용 스팀청소기를 내놓은 이후 현재까지 국내 스팀청소기 시장의 87.5%를 점유하고 있다. 2006년 출시한 스팀다리미도 26.4%의 시장점유율로 1위를 기록 중이다.
해외시장 공략도 적극적이다. 미국 중국 등에 해외 지사를 설립하고 현재 10여개국에 수출 중이다. 지난해 가전 매출은 국내외를 합쳐 1000억원으로 이 중 해외비중이 30% 정도 된다. 뷰티부문 까지 포함한 총 매출액은 1600억원였다.
한경희생활과학은 스팀 가전 전문회사에서 세계 최고의 가정생활용품 회사로 도약한다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책상과 의자가 세트로 구성된 백솔루션이라는 기능성 책걸상도 출시했다. 기존 자세교정 의자는 착석시 목을 심하게 숙이는 습관까지는 잡아주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백솔루션은 책상과 의자가 시스템으로 구성돼 상체 전체의 라인을 바르게 만들도록 설계 됐다. 최근 한국외대 스포츠건강과학센터 김태영 교수팀과의 임상실험에서 자세 교정과 피로감 감소 효과도 인증 받았다.
한경희 대표는 "백솔루션은 자세교정 책걸상의 필요성을 느낀 중학생 형제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프로슈머 1호 제품"이라며 "앞으로 소비자의 아이디어를 적극 반영해 세계 최고의 가정생활용품 회사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은정 기자 mybang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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