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야구선수 생활을 끝내고 인생의 새 출발선에 선 박찬호가 미술전시를 연다. 최근 책 출간에 이은 또다른 행보다. 한국인 메이저리그 1호로, 개인 통산 124승을 기록하며 아시아 출신 선수 최다승 신기록을 세운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족적과 '희망'이라는 주제를 문화사적 관점에서 되짚어볼 수 있는 전시다.
8일 오전 11시 반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는 '박찬호展(전)-우리 모두가 영웅이다' 개막에 앞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박찬호 선수는 두 개 층으로 이뤄진 전시장을 함께 돌며 도슨트 처럼 작품들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입구에서 마주한 작품은 한양대 시절부터 한화 이글스 때까지의 사진조각들을 모아 붙여 만든 당찬 모습을 띤 '박찬호 인물상'이다. 조각가 권오상 작가가 만들었다. 또한 '왕과 거지'를 테마로 해 영웅으로 칭송받으면서도 항상 내면에는 두려움이 내재됐던 박 선수를 그려낸 유현미 작가의 영상작품이 있다. '고독' 섹션에서 뮌(Mioon) 작가는 함성, 야유가 공존하는 마운드 위 박 선수의 내적갈등과 함께 수 백명의 관중으로 변한 박찬호를 담아 영상으로 나타냈다. 만화가 이현세 작가는 박 선수를 모델로 한 단편만화를 선보였다.
박 선수가 직접 만든 영상작품도 있는데 이는 현재 야구선수인 초등학생 조카를 모델로 해 자신이 어릴 적 야구 연습을 했던 골목과 집, 계단 등을 배경으로 했다. 자신의 투구 모션을 통해 물감이 번지게 한 액션 페인팅 작품도 등장한다.
또 다른 테마에서는 박 선수가 하나씩 수집해 왔던 선수생활과 관련된 아이템들이 비치돼 있다. 메이저리그 승리구 124개와 주요 이슈 공 6개를 비롯해 유니폼 50여벌, 모자 50여개, 배트 10자루, 헬멧 4개, 야구화 2켤레, 글러브 20여개 등 총 360여점에 달하는 소장품이 전시된다. 야구공에는 '지금 던질 공이 무엇인가', '넌 목표지점을 향해 공 하나만 최고로 던진다' 등의 문구가 씌여져 있다.
이외에도 박 선수의 투구 형상 조형물, 박찬호의 손이 야구공을 잡고 던질 때 나타나는 엑스레이 사진들이 작품으로 선보인다. 이주헌 서울미술관장은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로 힘겨웠던 시절, 국민들에게 희망이 된 박 선수의 야구 역정을 따라 그의 꿈과 고독, 영광의 순간들을 돌아보며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조망하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 전시 수익금의 일부는 베트남 어린이 심장병 수술 돕기 행사에 사용될 예정이다.
다음은 박찬호 선수와의 일문일답.
-이번 전시를 열게 된 소감은.
▲유능한 작가 분들이 동참해 전시 취지를 이해해주셔서 영광스럽다. 사실 나를 두고 영웅이라고 표현할 때마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우쭐댔지만, 그럴때 마다 무겁게 느껴져 그런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니 영웅이라고 해주신 분들 안에 바로 '영웅'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힘든 시절 박세리나 박찬호의 모습 그리고 지금은 류현진을 보면서 꿈과 용기를 갖는 분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 전시는 '스포츠와 미술의 만남'이란 형식을 갖는다. 선수시절에 행복해지기 위해 이기려고 했지만 이기고 나면 더 두렵고 불안했다. 또 다른 승리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너무 이기는 데만 집착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한국에 오니 승자에 대한 집착이 더 큰 것 같은 느낌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 하지만 승부욕, 상대만 생각하면 늘 불안하다. 이길 상대는 '나 자신'이 돼야 한다. 그러면 상대가 누구든 게임에 재미를 느끼고, 창의력이 생긴다. 나는 거울 속 자신을 보고 대화도 하고 욕도 하고 칭찬도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내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가진 갈등과 거만은 무엇인지 생각하는 거다. 결국 상대를 어렵게 느끼거나 또는 깔보는 것도 바로 나 자신이다. 이걸 아는 게, 나 자신을 이기는 게, 바로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또 이기기 위해서만 목숨 바치는데, 패자의 땀과 열정에도 엄청난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지금 후배들에겐 한걸음 한걸음 예술적 감각으로 최선을 다하자, 이 과정을 작품으로 보자고 이야기 하고 싶다. 상대가 이기면 존중하고, 잘하는 사람도 패자들에게 고마움 갖게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모자나 공, 글러브에 문구를 새겼던데 무슨 의미인가.
▲야구장 마운드 위에서 선수는 늘 두렵고 갈등한다. 또는 자신감이 과해질수도 있다. 각각의 상황마다 투수가 가져야할 마음가짐을 적어둔거다. 스스로 고민할 때, 심리치료를 받을 때, 선후배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찾아낸 그런 문구다. 나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문장이다.
-최근 책도 냈고, 이번엔 미술전시까지 하는데 앞으로 또 새로운 계획이 있다면.
▲지난 10주 동안 미술경영 수업을 들었다. 전시회를 준비하면서도 미술이란 것에 조금씩 이해력이 생기는 중이다. 물론 전문가랑은 비교가 안 되겠지만. 감각적인 것, 미술세계가 뭔지 그 심오함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고 경험하고 싶었다. 그 외에도 영화, 음악에 관심이 많다. 예술가들도 선수들처럼 작업을 할 때 어떤 패턴으로 스스로를 관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예술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해 집중하게 되고 설레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걸 창조해 내고 표현하는 게 매력적이다. 이번 미술전시가 11월 중 끝나게 되면 '야구 클리닉', '어린이 야구대회' 등 현장에서 야구와 관련한 일들을 계획하고 있다.
전시는 오는 11일부터 11월 17일까지. 서울미술관. 문의 02-395-0100.
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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