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절정에 이르렀다. 하림은 번지점프를 하듯 아득하게 떨어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소연의 팔이 하림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꼭 안은 채 밑을 알 수 없는 허공 속으로 한참동안 아득히 떨어졌다.
“하림 오빠.... 사랑해요.”
이윽고 먼저 정신이 든 소연이 작게 속삭였다. 그 소리에 하림 역시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사방은 조용하였고, 빗소리는 여전히 투덜거리듯 불만스럽게 들려왔다. 욕망이란 짐승은 이제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 머리를 한번 휘젓고는 얌전한 가축처럼 가만히 구석에 가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혜경이 떠올랐다. 혜경에게 미안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다른 여자와 사랑한다는 것은 위선이었고, 죄악이었다. 사랑은 나뉘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뉘어질 수 있다면 그 중 하나는 사랑이 아니거나 둘 다 사랑이 아니거나, 할 것이었다.
“미안해.”
하림은 혜경 대신 소연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긴 어쩌면 정작 자기가 미안해해야 할 대상은 혜경이 아니라 소연일는지도 몰랐다. 그러자 소연이 하림의 손을 이끌어 자기 뺨에 부비며 말했다.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돼요. 나도 오빠한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사실 난 하림 오빠가 고마워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왠지 좋아보였거든요.”
소연의 목소리가 잠겼다.
“이런 시골에서 누가 나 같은 애한테 모헨조다로의 눈 먼 가수 이야기나 일포스티노의 마리오와 베아트리체의 이야기를 해주겠어요. 그런 이야기는 내겐 너무나 낯선 이야기일 뿐이거든요. 그런 날, 오빠가 안아주니까 행복했어요.”
하림은 잠자코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소연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 속물이라고 했죠? 사실이예요. 알고 나면 하림 오빠도 실망하실거예요. 사귀던 남자, 있었는데 유부남이었죠. 내가 알바로 일하던 편의점 사장이었는데.... 너무 나쁜 사람이었어요. 나이도 많고, 돈만 아는 인간이었죠. 바보같이.....”
소연의 말끝이 흐려졌다. 하림은 갑자기 끊었던 담배가 무척 피우고 싶어졌다. 하지만 없었다. 그래서 그냥 누운 채 가만히 있었다.
“실망했죠?”
소연이 하림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림은 대답 대신 그녀에게 몸을 돌려 꼭 끌어안아주었다. 품안에 들어온 그녀의 숨결이 가슴에 느껴졌다.
“아니. 나야말로 소연이가 알면 실망할지 몰라. 머리속이 가득 들어있으면 뭘 해. 나 역시 이 나이 먹도록 알고 보면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을 뿐인데....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고 하는 일조차 사실 자신이 없어.”
하림은 진심이었다. 혜경과의 관계도 불확실 했고, 학원 일도 언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 내려온 것도 그런 막연함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도피였는지도 몰랐다.
“참 오래간만이네요. 이렇게 편안한 것.....”
소연이 하림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하림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그래도 사랑하지는 말자.”
그러자 소연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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