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난 속물이예요.”
“속물....?”
하소연이 뜻밖의 단어를 꺼내자 하림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사실 나도 기다리고 있는 게 있긴 있어요.”
조금 있다 소연이 하림을 쳐다보며 말했다.
“뭔대?”
“들으면 실망할 거예요. 내겐 영화 속 마리오처럼 그런 고상한 기다림이 아니라, 아주 흔해빠진 기다림 같은 것. 솔직히 말하면 대학 가고 싶고, 돈도 벌구 싶고, 그래서 오빠처럼 지적이고 멋있는 남자친구랑 사귀어보고 싶은.... 그런 기다림, 그게 전부예요.”
소연의 말에 하림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해서 좋네.”
“놀리시는 건가요?”
소연이 토라진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 우린 사실 아직 서로를 잘 모르잖아. 이제 겨우 두어번 만났을 뿐인데....난 그저 소연이가 시를 배우고 싶다고 하여 시 이야기를 했을 뿐이야. 시를 생활처럼 살아가는 전문적인 시인이라면 모를까 우리는 모두 자기 앞에 놓인 일상적 삶 앞에 열심이지 않을 수 없어. 시를 쓰긴 했지만 마리오는 여전히 가난한 어부였고, 베아트리체는 카페에서 술을 팔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지. 그걸 가지고 아무도 속물이라고는 하지 않아.”
하림은 다시 주전자에 물을 붓고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창문께로 걸어가서 창문 밖을 한번 쳐다본 다음 창문을 닫았다. 창 아래에 비가 들어와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근데 너 대학 가고 싶다구 했니?”
창문을 닫은 하림이 돌아서며 말했다.
“응. 늦었죠....? 내년이면 벌써 스무살 하고도 세 살이니까.”
“아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해. 하지만 그저 막연히 대학에 가겠다면 차라리 가지 않는 게 나아. 실망만 할테니까.”
“하림 오빤 대학 나왔으니까 그런 말 하는 건지 모르잖아요.”
“그렇긴 해. 하지만 이래봬두 나도 얼마 전까진 입시학원에서 잘 나가는 선생이었거든.”
“정말....?”
소연이 눈을 반짝 뜨며 하림을 쳐다보았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여기 오기 얼마 전 내가 다니던 학원이 망해서 원장이 도망가는 바람에 나도 쉬고 있는 중이었어.”
“아, 그랬어요?”
“응. 그러니까 너 같은 애들도 많이 봤어. 뒤늦게 대학 가겠다며 나타난 마흔살 넘은 아저씨도 봤구. 어쨌든 나한테 잘 보여. 그러면 시도 가르쳐주고, 덤으로 대학 가는 법도 가르쳐줄테니까.”
하림이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아, 좋아요. 마리오에게 네루다가 나타난 것보다 더 좋네요!”
“대신 공부는 네가 하는 거야. 나는 그냥 바라만 볼 뿐이구.... 시간을 많이 빼앗아도 안 되고....”
하림이 다짐이라도 하듯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일주일에 딱 두 번만 찾아올게요! 됐죠? 나도 언니 가게 봐줘야 하니까.”
소연이 다시 커다란 소리로 활달하게 대답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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