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이 태수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동안 하림도, 혜경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도 먼저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그이가 문제가 많았던 인간이란 건 알아. 하지만 내가 그이랑 결혼한 건 그냥 그이가 막무가내였거나 내가 철이 없어서 저지른 일만은 아니었어. 솔직히 말해 그인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많았어. 흔히들 아웃사이드라 불리는 그런 류의 사람들처럼 말이야.”
혜경의 고백은 바늘처럼 하림의 마음을 찔렀다. 하지만 그녀는 작정이나 한 듯이 계속해서 말했다.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 이 세상의 질서에 튜닝되기 싫어 거짓 위악을 저지르는 인간들 말이야. 알고 보면 한없이 약하고 여린데도 불구하고, 겉으론 마치 악의 화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껄떡거리고 다니는 사람들.... 학교에선 문제아라 불리고 사회에선 비적응자, 낙오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말이야. 은하 아빠도 어쩌면 그런 사람이었는지 몰라.”
혜경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이는 전자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어했어. 쾅쾅거리는 롹을 좋아했지. 한동안 선배들이 하는 밴드를 따라 다니기도 했으니까. 나중엔 음악주점에서 기타를 치기도 했어. 거기서 만난 주먹 세계 건달들을 형이라 부르며 쫒아다니기도 했고.... 나중에 그들에게 이용을 당해 재산까지 홀랑 다 날려 먹어버렸었지만....”
그런 그는 죽어서도 여전히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하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돌린 채 누워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가 남기고 간 빈 자리가 그렇게 오래도록 깊게 남아 있을 줄은 몰랐었다. 그 자리에 자기가 쉽게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그렇게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보니 하림 오빠한테도 그늘이 있네요. 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윽고 소연이 말했다.
“처음 하림 오빠 이곳에 오던 날 모습이 기억나요. 어쩐지 실연당한 사람 같았던 느낌이랄까. 그랬어요.”
“후후, 그래? 하긴 실연까지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긴 해.”
하림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런 말, 나 같은 게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같은 여자로서 느낌을 말하라면 모든 건 하림 오빠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봐요. 오빠가 그 여자분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
“후후. 너 정말 여자처럼 말하는구나. 물론이다. 나도 노력은 해. 하지만 그 사람에겐 그 사람의 꿈이 있어. 그 꿈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지 않겠니?”
“어떤 꿈인데요?”
“인생의 차수를 바꾸어보고 싶다는 꿈. 근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아프리카 어딘가로 가고 싶대.”
“아프리카...?”
“응. 그게 아프리카든 어디든 상관이 없을거야. 여기서 이렇게 사는 삶이 싫대. 인생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인대나.”
--인생을 낭비한 죄, 그래,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한번 밖에 없는 생이잖아?
그날 그녀는 하림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었다. 왜 굳지 낭비라고 표현했을까? 소연이 말대로 자기의 사랑이 그녀를 묶어두기에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하지만, 그래도 오빤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잖아요? 그 분도 혼자고 오빠도 혼자니까.”
소연이 말끝을 흐렸다.
“어디에 있건, 어디로 가건,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여자분은 행복하실 거예요.”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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