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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4장 낯선 사람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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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4장 낯선 사람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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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일은 없어요? 하는 윤여사의 질문에 하림은 하소연이랑 이장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괜히 이야기가 길어질까 겁이 났던 것이다. 하림은 전화에 대고 이러쿵저러쿵 장광설을 늘어놓는 건 딱 질색이었다. 웃으라고 하는 이야기 중에 여자 둘이 전화를 하는데, 한참동안 전화에다 있는 수다 없는 수다를 다 떨고나서 하는 말, “야,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라는 게 있었다. 여자들의 전화 수다를 빗댄 농담이겠지만, 하림으로 말하자면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용무만 간단히’ 옛날 공중전화에 붙어있던 구호처럼 하림은 정말 용무만 간단히, 였다. 윤여사와의 통화도 고장난 수도 이야기만 하고 그렇게 간단하게 끝을 맺었다.

그러나 윤여사는 할 말이 조금 더 남아 있었는지 전화를 끊지 않고 미적이다가 하림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자,
“무슨 일 있음 또 전화 하세요!”
하고 하나마나한 말을 붙이고는 그제야 끊었다.


어쨌거나 이제 사람을 보내준다고 했으니 앉아서 기다리면 되었다. 하지만 당장 쓸 물이 없으니 보내준다는 사람이 와서 수도를 고칠 동안, 부지하세월 무작정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림은 물통으로 쓸 만한 것이 없나하고 뒤적여보았다. 다행히 보일러실과 함께 쓰는 창고 안쪽에 뽀얗게 먼지 앉은 10리터짜리 흰색 빈 약수통이 하나 있었다. 혹시 석유를 담았던 통인가 하고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니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하림은 일단 수도 고칠 사람이 오기 전에 쓸 물이라도 받아둘 요량이었다.

물통이 구해지자 하림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걸치고 나와 물통을 들고 어제 차를 타고 들어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공기는 신선했고, 환한 하늘에서 아침 햇살이 나른하게 내리쪼이고 있었다. 어제 이장이 쓰레기를 태우던 과수원, 이제 보니 복숭아밭이었는데, 에서는 작은 박새들이 무리지어 날아다니며 들까불어대고 있었다. 수십 마리가 떼지어 장난질이라도 치듯 화르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박새들의 무리는 마치 하늘에다 풀어놓은 송사리떼처럼 가벼웠다. 그들이 내어지르는 짹짹거리는 소리가 투명한 유리관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대기 속으로 튀어올랐다. 물기에 젖은 대기 속에서는 흙냄새가 물씬 나고 있었다. 어젯밤 가볍게 내린 비 탓인지 길 도처에 진흙창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림은 극도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야흐로 봄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길고 무거웠던 겨울이 떠나가기 아쉬운 듯 아직 냉기 품은 바람을 날리며 돌아보고 있었지만, 일음이양위지도(一陰一陽謂之道)요 궁즉반(窮則反)이라, 오는 계절은 어쩔 수가 없었다. 빈 물통을 들고 꺼떡꺼떡 과수원 길과 논길, 밭길을 따라 마을을 향해 걸어가는 하림의 가슴도 괜히 근질거렸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아침에 물이 나오지 않아 나빠졌던 기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림은 어제 하소연이 내려줬던 길목수퍼로 가 볼 생각이었다. 이 마을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정작 그녀 하나뿐이었기도 했지만 가는 김에 물도 얻고, 하소연이도 한번 더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노랑머리 꽁지머리 푸른 점의 아가씨....!’
하림은 노래라도 부르듯 그녀를 놀려댈 가사를 생각해냈다.
‘아니, 푸른 점은 빼는 게 좋겠어. 괜히 자존심 상하게 할 필요는 없잖아. 노랑머리 꽁지머리 대머리....푸푸, 그건 더 안 되지. 그럼 노랑머리 꽁지머리 뭐라할까.’
기분이 좋아진 하림은 제멋대로 속으로 지껄이며 마을 삼거리 입구에 있는 길목수퍼를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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