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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3장 화실이 있는 풍경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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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3장 화실이 있는 풍경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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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저어기 내려주세요! ‘길목 수퍼’라고 보이죠? 그리고 아저씬 왼쪽 길로 조금만 더 가세요. 그러면 포도밭 옆에 작은 조립식 건물이 보일거예요. 거기가 재영 이모네 화실이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소연이 다시 활발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가 약간 높은 둔덕에 자리 잡은 길목 수퍼 앞 이동식 테이블에는 마침 노인 둘이 막걸리를 놓고 앉아 있다가 차가 서자 누군가 하고 내려다보았다. 소연이 내리고나자 하림은 다시 차를 몰아 소연이 가르쳐준 대로 길을 따라 내려갔다. 얼마 가지 않아, 저수지가 나타났고, 그 옆에 빈 축사 하나와 포도나무 밭이 나타났다. T자 형의 말뚝이 외인부대 무덤의 십자가처럼 줄지어 서있는 포도밭에선 누군가가 쓰레기를 태우는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윤여사의 화실은 포도밭을 지나 잡초가 무성한 넓은 개활지 중간에 댕그라니 혼자 있어, 금세 눈에 띄었다. 하림은 차를 화실 바로 옆 마당, 수도가 있는 곳에 주차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먼저 화실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화실 바로 앞엔 뽑다 남은 배추가 얼어붙은 채 남은 제법 넓은 밭이 있었고, 왼편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마음대로 자란 작은 언덕이 있었다. 뒤쪽에는 길 하나 건너 아까 지나온 포도나무 밭이 보였다. 저수지는 작은 언덕 위에 올라서면 바로 코 앞에 보였다. 별로 크지 않은 저수지였다. 하림이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뒤에서 흠흠거리는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잠바 차림에 운동모를 쓴 마흔 중반 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뒷짐 진 손에는 낫을 들고 있었다.

“뉘시오?”
사내는 대뜸 하림을 향해 물었다. 입에서 썩은 막걸리 냄새가 났다.
“아, 안녕하세요!”
하림은 약간 과장되게 웃으면서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한 다음,
“저는 장하림이라고 합니다. 여기 화실에 당분간 머물려고 왔어요.”
“여기서....?”
사내는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 하는 표정으로 하림을 쳐다보았다.


“예. 실은 여기 주인되는 윤재영 씨랑 친구거든요.”
하림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둘러대었다.
“윤재영이랑......?”
사내는 더욱 의심스런 눈빛으로 하림을 쳐다보았다. 하림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술냄새까지 풀풀 풍기면서 처음 보는 사람 대하는 꼴이 마치 지명수배자 앞에 둔 형사 같았기 때문이다. 하림은 웃음기를 거두고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사내를 무시하듯 시선을 다시 딴 곳으로 돌렸다. 그러자 사내가 이번에는 조금 공손한 어투로,
“나 여기 이장이오.”
하고 비로소 자기 소개를 하였다.


그랬군. 하림은 그제야 사내가 꼬치꼬치 캐묻던 것을 다소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그럴 만한 권한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윤재영 씨 집안이랑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지. 그네 부친이 읍에서 고물상을 했던 것까지두. 그래서 저쪽에서 쓰레기를 태우다가, 이쪽으로 차 들어올 일이 없는데, 누군가 해서 따라와 본 거요.”
이장은 그렇게 두서없이 변명처럼 한 두 마디를 더 뱉은 다음,
“겨우 내내 비어있던 집이라, 보일러는 괜찮은지 모르겠구먼.”
하고 묻지 않은 걱정까지 해주었다. 어쨌거나 이장이라는 말에 하림은 조금 안심이 되어 다시 처음의 웃는 얼굴로 돌아와서,
“한 달 전엔가 윤재영 씨가 와서 손 봐 놓고 갔답니다. 이제 들어가서 한번 점검해봐야죠.”
하고 말했다. 사내는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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