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하긴 하지만 어쨌든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여긴 새장 같이 답답해. 이대로 주저앉아 미장원에서 여자들 머리나 볶아주면서 나이 들어가는 게 어쩐지 슬퍼. 억울하기도 하고.....옛날에 나왔던 빠삐용이란 영화 기억 나? 주인공 스티브 맥퀸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죄수가 되어 끌려가다가, 심판관인 신들에게 묻잖아. 내 죄가 뭡니까? 그러니까, 역광 속에 서있던 그 중의 하나가 대답을 하지. 인생을 낭비한 죄라고 말이야.”
그리고나서 혜경은 후후거리며 혼자 자조하듯 웃었다.
“인생을 낭비한 죄, 그래,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한번 밖에 없는 생이잖아?”
“그렇다해도 떠날 데도 없잖아? 어디로 가?”
하림이 반대편으로 돌아누우며 자문이라도 하듯 말했다.
“아프리카에 가서 엔지오 활동하는 언니가 있어. 르완다라고 한때 종족간에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던 곳이야. 얼마 전에 그 언니가 자기가 일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보내줬어. 거긴 어디에나 마찬가지지만 물이 부족해. 붉은 흙이 바람에 휘휘 날리더라. 마을엔 쇠똥으로 담을 만든 집이 있고,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었어. 전기가 부족해 정전도 잦대. 그리고 도마뱀이랑 모기도 많고.... 언니는 그곳에서 현지 여자들을 도와 버섯농장에서 일하고 있어. 물을 길려면 당나귀를 끌고 한시간이나 걸어가야 된대. 그런데도 오고 싶으면 언제든 오라고 하더라. 고생할 맘 단단히 먹고 말이야.”
혜경의 말을 들으며 하림은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아프리카 다큐멘타리를 떠올렸다. 열대의 눈물이든가. 가난과 부패, 열악한 자연환경.... 어쩌면 혜경은 문학소녀 때 쓴 자기의 시귀절처럼 철없는 모험을 상상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냥 고생이 아니라 개고생일걸....”
하림이 조금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혜경의 말은 그게 아니었다.
“가난하고 고생하며 사는 건 두렵지 않아. 그냥 이렇게 내 생이 고정되어 버리는 것이 더 두려워. 아침에 눈을 뜨면 만나는 똑같은 사람, 똑 같은 일, 똑 같은 뉴스....”
혜경은 천장을 향해 멀리 시선을 던져두고 독백이라도 하듯 말했다.
“내 것이 아닌 세상의 물결에 휩쓸린 채 모래시계처럼 빠져나가는 나의 생이 두려워. 세상은 나를 이미 자기에 맞게 튜닝을 했고, 난 그 속에서 꼭두각시가 되어 살고 있는 느낌이야.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이라면, 이렇게 늙어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혜경이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난 이 대한민국 서울이 싫어졌어. 아니, 무서워. 어딜 보나 시멘트 벽 뿐이지. 시멘트 콘크리트로 만들어놓은 거대한 감옥처럼 말이야. 아니면 무덤이든가. 그 속의 구멍마다 다들 몇 억 몇 십억 하며 들어앉아 있는 걸 보면 꼭 모두 이상한 마술에 취한 사람들 같애. 잘 산다는 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 난 차라리 붉은 모래 바람이 휘휘 날리고,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풍경이 더 편안해 보여. 사람들의 표정도 그렇고.....”
혜경의 말은 예상 밖으로 진지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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