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의 웃음이 파도처럼 하림의 가슴으로 전해져왔다. 하얀 이마 아래 그린 듯 까만 눈썹과 깊게 패인 볼우물이 황홀했다. 형광등 불빛 아래였다. 어디선가 멀리 라디오에서 옛날 노래가 흘러오고 있었다. 커피잔을 놓고 하림은 몸을 돌려 가만히 혜경의 젖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늘 서툴렀지만 혜경은 부드럽게 하림의 입맞춤을 받아주었다. 처음에는 커피 맛이 났고, 다음에는 은은한 치약 맛 같은 것이 났고, 다음에는 짭조롬한 바다 맛이 났다.
“혜경아, 사랑해.”
하림은 카드에 쓴 글과 똑같이 말했다. 그 말을 할 때면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고 했다.
누가 그랬던가. 사랑이란 갈 수 없는 나라의 이름이라고..... 갈 수 없어서 더욱 그리운 나라가 사랑이랑 이름의 나라인지도 모른다. 팔당 저수지 올라가는 강가 회색 시멘트 벽에도 갖가지 색깔로, 갖가지 형태의, 갈 수 없는 나라의 애틋한 심정을 표현한 글 ‘아무개야, 사랑해!’가 촘촘히 그려져 있다. 크고 작은 색색의 글 속엔 그들만의 갖가지 사연들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나 똑 같은 말, 태고로부터 지금까지, 또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쓰고 또 쓰도 전혀 닳아지지 않을 말, ‘사랑’이란 공통어를 쓰고 있었다.
하림 역시 그 말이 자기 입에서 나오는 순간, 순식간에 혜경이 자기 앞에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초조감과 애닯은 마음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는 어느 시인의 시가 있다. 아무도 그 섬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 섬의 이름은 분명 그리움일 것이다. 갈 수 없는 나라라는 이름의 사랑은,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섬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림에겐 혜경이 바로 그 나라였고, 그 섬이었다. 그녀에게선 그런 그리움의 냄새가 배여 있었다. 찌는 듯한 여름날, 계곡으로 엠티를 갔다가 나란히 바위에 앉아 햇볕을 쬐던 문예반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검은 숲에서는 매미가 맴맴맴, 귀가 따갑게 울리고 있었다. 푸른 하늘은 깊은 바다처럼 보였고, 흰 구름은 바다에 풀어놓은 돛단배처럼 보였다. 하림은 바위에 비스듬히 누워 무심한 척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혜경을 쳐다보았다. 혜경은 바다 같은 하늘과 흰 돛단배 같은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박혀 있었다. 그 모습은 하림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사진처럼 깊이 인화되었다.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사진. 사람들은 그런 걸 가리켜 첫사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나, 사실 아까 감동 먹었다?”
혜경이 약간 코가 맹맹해진 소리로 말했다.
“.......”
“장갑 말이야. 노란 털장갑. 내가 꼬옥 갖고 싶었던 거였거든.”
“.......”
“그보담, 난 네가 같이 넣어서 준 카드,.... 쬐금 눈물 나려고 하더라.”
“담에 더 좋은 거 선물할게.”
“후후. 됐어, 바보! 난 네가 옆에 있어준 것 만 해도 고마워. 은하한테도 그렇구.”
혜경이 하림의 품에 안기며 어깨에 얼굴을 부비면서 말했다. 혜경의 머리카락에서 희미한 바다 냄새가 났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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