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동희의 엔터톡톡]2년 여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한석규는 '천만 클럽' 가입이 가능할까.
아직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가능성은 아직 반반이다. 그가 주연한 영화 '베를린'은 700만명 돌파를 눈앞에 뒀지만 아직 1000만까지는 갈 길이 멀다. 관객 증가세가 급격히 줄고 있고, 새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하고 있어 일각에서는 900만명 돌파도 어렵지 않겠느냐는 분석도 나온다.
'1000만명'은 한석규에게 의미가 깊은 숫자가 아닐 수 없다.
90년대 '그'는 대한민국 영화사에서 '흥행'의 아이콘이었다. 1996년 '은행나무 침대'를 시작으로 '넘버3' '접속' '쉬리'로 이어지는 그의 영화들은 당시 화제를 모으며 최고의 흥행작들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1998년작 '쉬리'는 90년대를 통틀어 영화 흥행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거대 할리우드 자본력에 맞설만한 한국 영화는 거의 없었다. 침체기를 걷고 있던 한국 영화는 그저 멜로나 코미디 장르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쉬리'의 등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무비'의 첫 시작이라는 점에서 '쉬리'는 큰 평가를 받고 있다.
'쉬리'가 흥행사에서 주목받은 건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대작 '타이타닉'의 191만명(서울관객 기준, 추정치)의 기록을 깼기 때문이었다. 당시 '쉬리'의 서울관객 기록은 245만명(서울관객 기준 최고의 200만명 돌파 영화다)이었다. 더 놀라운 건 당시 '타이타닉'의 기록을 자국 영화가 넘어선 건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 당시만 해도 통합전산망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여서 관객수 집계는 배급사 자체 집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그나마 정확한 집계는 서울 지역에서만 이뤄졌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쉬리'의 전국 관객수 추정치는 540만명에서 620만명으로 들쑥날쑥이다.
지금의 집계 방식이었다면 '쉬리'는 전국 800만명 이상의 관객이 집계 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요즘 한국영화 위상을 따진다면 분명 1000만명 돌파도 가능하다.
하지만 한석규는 '쉬리'가 흥행의 정점이었다. 이후 그는 몇년 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2000년대 들어 첫 주연을 맡은 '이중간첩'(2002년작)의 실패가 컸다. 이 영화는 당시 50억원에 가까운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 붇고도 흥행과 비평을 모두 놓쳤다. 당연히 화살은 한석규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쉬리'와 비슷한 분위기의 첩보 액션 영화인데다 한석규 역시 '쉬리'를 넘어선 연기를 선보이지 못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후 한석규는 연기적인 변신을 꾀하며 한국영화 대표 배우의 자존심을 세우기는 했지만 작품들의 화제성에 비해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이중간첩' 이후 12년이 지나 선택한 작품이 바로 '베를린'이다.
'베를린'에서 그가 맡은 국정원 요원 정진수에게는 '쉬리'의 유중원과 '이중간첩'의 임병호 두 캐릭터가 모두 비춰지고 있다. 남과 북이 소재이고, 첩보 요원들을 다룬 영화라는 점이 겹쳐지면서 멋진 수트와 권총을 손에 든 한석규는 영화팬들의 머리속에 15년의 시간을 넘나들고 있다. 우연히도 '쉬리'는 그에게 '흥행킹'의 수식어를 붙여준 작품이고, '이중간첩'은 슬럼프의 계기가 된 작품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베를린'은 한석규에게 일종의 도전이었고, 또한 충무로에서 또 다른 시작이 될 작품이 분명하다.
90년대 '흥행'의 아이콘이지만 아직 한석규는 공식적으로 1000만명을 넘긴 작품을 필모그래피에 추가하지 못했다. 물론 한석규는 그동안 '흥행' 만을 고려해 작품 활동을 해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팬의 입장으로 '천만 클럽'에 한석규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조금 아쉽다.
이제 한석규는 조만간 새 영화로 다시 팬들을 찾는다.
다시 그는 '베를린'의 정진수의 색깔을 빼고 음악교사 상진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홍동희 기자 dhee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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