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철의 그림살롱 109회 | 서양화가 신정옥 ‘꽃의 결 또 저 너머에’ 연작
열림 그 순간의 황홀감, 춤추듯 우아한 떨림의 자태, 적멸(寂滅)의 시·공에 흐르는 애틋함. 예쁘게 피어나려 애썼을까, 꽃에게 물어보라. 다시 바라본다. 휘어지는 저 순응. 산호색 꿈을 꾸는 듯이….
해미석(海美石)이 가랑비에 젖는다. 물기가 촉촉이 감싸면 돌은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잔바람에 꽃잎은 날리고 윤기 위로 꽃들이 나풀거렸다. 꽃과 한몸이 된 잔돌들 사이 하얀 물거품이 밀려왔다.
엷은 색 테라스가 있는 언덕 위의 집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모퉁이를 돌자 짙은 꽃향기가 유혹하듯 허공을 부유했다. 상록성 덩굴엔 천진난만 귀여운 하얀 재스민 꽃들이 햇빛을 받아 옅은 오렌지색 파스텔 톤으로 가벼이 하늘거렸다. 바다는 휴식처럼 잔잔하고 레몬 한 조각 찬 음료는 갈증을 녹였다. 백색의 꽃들 사이 코발트블루 바다가 너무나 아름다워 매료됐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몽상의 궁전으로 이끌렸다.
‘노란 접시꽃 한 송이를 들고 나타난 남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세월이 흐른대도 꽃처럼 신선한 그리움을 기억하며>라고 짤막한 기록을 막 남기던 터였다. 그때 쑥스럽게 내민 감청색 라피스라줄리(lapis lazuli) 팔찌. 선뜻 손 내밀지 못하는 순수의 수줍음만큼이나 찬란한 광채가 돌았다.’
어느새 석양볕이 가늘게 날리는 머릿결 위로 내려앉는다. 꿈이란 덧없는 것인가. 살짝 입술을 깨문 그녀. ‘보석보다 그대와 걷는 생(生)의 꽃이 되고 싶었었다’라고 작은 수첩에 적었다. 기쁨과 슬픔 그 망각의 세월에 변주되는 삶의 여행길처럼 물결은 누렇게 달아오른 금빛몸짓으로 반짝였다. 바다의 미혹에 홀린 것이 아니라 이별을 앞둔 창백한 만남처럼 존재의 매우 짧은 순간이 깊이 각인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종종 그러한 때면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사로잡혀 길을 나서곤 했다.
오목눈이 새가 입에 뭔가를 물고 재빠르게 재스민 꽃 덩굴을 휘익 넘어 알이 있는 둥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합창 대신 애살맞은 고독의 시간을 준비하는 새 날개짓에 소란스런 관념들이 노을 속으로 사라져갔다. “인간 삶이 경계선 아주 가까이에서, 심지어 경계선과 맞닿은 곳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에, 인간 삶이 경계선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것이 아니라 겨우 1밀리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인간 삶의 모든 신비가 놓여 있었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웃음과 망각의 책>
밤하늘의 색채 물처럼 흐르는 세월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 피아노 선율이 공허함을 위로하듯 평화롭게 흐른다. 신비로운 빛깔들을 쏟아내는 리듬. 핑크빛 봉오리에 생명이 움트고 들꽃 한 송이 푸른빛에 반짝였다. 아아, 환상(幻想)에 사로잡혀도 눈물이 나는가!
이코노믹 리뷰 권동철 기자 k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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