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지와 인터뷰를 했던 한 시간 동안, 그의 휴대폰에서는 쉬지 않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추천곡을 배경음악 삼아 인터뷰가 진행됐고, 덕분에 인터뷰 녹음 파일에는 대화를 나누던 그 때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만약 선생님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다섯 곡을 추천해오라’는 숙제를 내줬다면, 이윤지는 가장 꼼꼼하게 준비해 온 학생으로 뽑혔을 것이다. 이 노래는 이 가사가 좋다, 이 노래는 간주가 정말 좋다, 또 이 노래는 몇 분 몇 초부터 몇 분 몇 초까지 딱 3초가 최고다, 그러다가 다섯 곡이 넘어간다 싶으면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어떤 곡을 제외시킬지 한참이나 고민하는 이윤지를 보고 있으니, “제가 (음악에 대해) 많이 몰라도 음악 얘기할 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라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마치 자식 자랑하듯 자신이 준비해 온 음악들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소개하며 한 시간을 알차게 채운 이윤지의 성실함은 그가 그동안 작품에서 보여준 모습과도 일맥상통한다. 브라운관 속 이윤지는 언제나 귀엽고 발랄하지만 결코 상식의 경계선을 뛰어넘는 법이 없는, 굴곡 없는 인생을 사는 아가씨였다. MBC <더킹 투하츠>에서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은 재신 공주가 이윤지에게 “늘 숨이 찼던” 캐릭터였던 건 당연하다. “어떻게 보면 준비하고 있을 때 닥친 시련은 시련이 아니잖아요. 그건 그냥 좋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잖아요. 재신에게 닥친 시련처럼, 재신 역시 저한테 예고 없는 시련으로 다가왔어요. 정말 대기 시간동안 아무것도 못했어요. 책도 못 읽고, 학교 숙제도 못하고, 산책도 못하고. 재신이 성격을 이해하려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이렇게 된 것 같아요. 감정의 기복이 컸지만 그만큼 많이 배웠어요.” 대본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윤지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줬던 것은 음악이었다. “매번 작품을 할 때마다 그 때에만 집중적으로 듣는 노래들이 생겨요. 이번 <더킹 투하츠>를 할 땐 사랑에 관한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작품마다 저만의 OST 앨범이 있었던 셈이죠. 이걸 빨리 인지했으면 폴더별로 정리를 해놨을 텐데 너무 아쉬운 거 있죠? 이제부터라도 작품별 OST 폴더를 만들까 해요.” 다음은 때로는 재신 공주에게 힘이 되고, 때로는 재신 공주를 연기하는 이윤지의 어깨를 다독여준 곡들이다.
<#10_LINE#>
1. Tang Wei의 <만추 (?秋)>
“영화 <만추>는 아직 못 봤는데 영화 포스터에 있는 탕웨이의 스틸샷이 참 좋았어요. 이 작품이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지, 탕웨이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잘 모르지만 제가 연기를 하면서 이런 스틸샷을 찍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OST는 재신의 대사를 읽으면서 많이 들었던 곡이에요. 일단 탕웨이의 목소리가 힘이 됐고, 사랑은 지나가지만 어쨌든 그 안에서 희망을 찾아내고 살아가야 한다는 가사와 그녀의 목소리가 참 잘 어울리더라고요. <더킹 투하츠>가 추운 봄에 시작했고 이제 뜨거운 여름이 오려고 하는데, 재신은 여름 없이 혼자 가을로 훌쩍 가버린 느낌이었어요. 그야말로 만추잖아요. 잘 때도 틀어놓았던 노래라 이젠 전주만 나와도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아요. 영화 보면 더 힘들 것 같아요. 어떡하죠? 영화 보지 말까요? (웃음)”
2. 달콤한 소금의 <인생은 아름다워 (Single)>
“‘만추’가 재신 연기를 하던 도중에 발매된 노래였다면, ‘그게 사랑’은 예전부터 듣던 노래였어요. 평소에 무한 반복해서 듣던 노래였는데, 갑자기 이 노래와 재신이 만나면서 제 플레이리스트의 우선 순위권으로 들어왔죠. 하하. 제목부터 임팩트가 있잖아요. 특히 이 노래는 간주가 참 좋아요. 가사가 없는 연주곡도 좋아하지만 가사가 지나고 난 후 음악만 들리는 구간도 정말 좋아해요. 노래 전체를 좋아해서 듣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게 사랑’처럼 간주가 좋아서 듣게 된 노래도 있고, 좀 창피하지만 1분 몇 초부터 몇 초까지 좋은 곡도 있어요. (웃음) 카페에서 친구들과 얘기하는 도중에도 갑자기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어떤 부분에 탁 꽂히면, 친구와 얘기를 끝내고 카운터에 가서 이 노래 전에 나왔던 곡목이 뭐냐고 물어봐요.”
3. 소란(Soran)의 <벚꽃이 내린다>
“좋아서 하는 밴드 콘서트를 갔는데 소란의 보컬 분이 관객으로 오셨어요. 좋아서 하는 밴드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전 계속 그분만 쳐다봤어요. (웃음) 이젠 이 노래가 꽤 유명해졌더라고요. 소란 분들한테는 좋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아까워요. 이 노래가 나온 시기가 정말 봄이 오기 직전이었는데, 벚꽃이 내린다는 표현이 정말 좋았어요. ‘내 눈앞이 분홍으로 물들어간다’는 가사도 좋아하고요. 어떤 대본을 읽을 땐 참 예쁜 노래였는데 어떤 대본을 볼 땐 참 슬픈 노래가 되어있고, 마지막에 들을 땐 ‘내린다’는 표현이 정말 슬프게 다가왔어요. 봄날 재신이를 만나면서 어떻게 해야 될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때 그 봄에 이 노래가 함께 있었어요. 덕분에 봄을 잘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4. Ryo Yoshimata의 <냉정과 열정 사이 OST (冷靜と情熱のあいだ)>
“보통 영화를 보면 OST를 꼭 찾아 듣는 편”이라며 최근에는 영화 <러브픽션>의 주제곡도 인상 깊게 들었다는 이윤지의 네 번째 추천곡은 <냉정과 열정 사이 OST> 앨범에 수록된 ‘History’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OST 앨범은 전곡이 다 좋아요. 제 마음을 알아주는 앨범이라고 할까요? 그중에서 어렵게 고른 ‘History’ 역시 정말 좋아해서 차마 추천하기 어려운 곡이에요.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를 먼저 봤는데 책이 너무 좋아서 영화를 볼 자신이 없었어요. 다행히 영화도 나쁘지 않더라고요. 둘 다 정말 좋게 봐서 제가 혼자 가는 첫 여행지로 이탈리아 피렌체를 선택했어요. 그곳에서 ‘History’를 듣는 것만으로도 나 홀로 여행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요.”
5. Jason Mraz의 < I Won`t Give Up >
이윤지의 마지막 추천 곡은 Jason Mraz의 ‘I Won't Give Up’이다. “노래 제목과 재신이의 상황이 잘 맞았어요. ‘I Won't Give Up’이라는 가사가 나올 때마다 재신으로서 힘을 얻는 느낌이었고, 윤지로서도 많이 다짐을 하게 만든 곡이에요. 재신이 울고불고하면서 모두를 떠나보낸 후 은시경의 환영을 보며 혼자 다짐을 하는 신이 있어요. 그 신이 없었다면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재신은 정말 많이 파헤쳐진 캐릭터였는데, 그 아픔을 힐링할 수 있었던 장면이었어요. 비록 제이슨 므라즈가 ‘I'm Yours’로 히트를 치긴 했지만, 저한테는 ‘I Won't Give Up’이 최고의 곡인 것 같아요. 좋은 노래들은 어떻게든 귀에 꽂히는 것 같아요.”
<#10_LINE#>
음악과 드라마 이야기를 8:2 비율로 하고 있는 이윤지에게 슬쩍 라디오 DJ에 대한 욕심은 없냐고 물어보자 “MBC 라디오 <푸른밤, 정엽입니다>의 일일 DJ를 했는데 정말 그 자리를 뺏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무서운 농담이 돌아왔다. “언젠가 배우와 DJ 모두 할 수 있는 타이밍이 온다면 그때는 누구도 아닌 이윤지로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특히, 끝과 시작이 만나는 심야 시간대의 라디오를 하고 싶어요.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분모로 친해진 개그우먼 (박)지선이가 DJ의 꿈을 먼저 이루긴 했는데, 나중엔 꼭 둘이 같이하고 싶어요. 저희끼리 라디오 콘셉트랑 코너까지 다 짜놨어요. (웃음)” “기대가 되지 않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윤지는 기대가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고 싶은 “철없는” 30대를 꿈꾸고 있다.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20대를 너무 조신하게 보냈어요. 그래서 20대 같은 30대를 보내고 싶어요. 더 많이 여행하고, 더 거침없이 도전하고 싶은 바람이에요. 뒤늦게 후회를 할지라도 그런 마음으로 임해야 30대가 즐겁지 않을까요?”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 이가온 thirteen@
10 아시아 사진. 이진혁 eleven@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