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양재찬 논설실장]유로 2012 결승에서 스페인이 이탈리아를 꺾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잔치는 끝났다. 환호와 아쉬움을 접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상생활도 축구 경기처럼 신나게 뛰며 짜릿한 골 맛을 볼 수 있을까. 현실은 냉정하다. 유로 2012 성적이나 국제축구협회(FIFA) 랭킹이 그 나라 경제력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공교롭게도 유로 2012 우승ㆍ준우승국이 지금 유로존에서 경제 사정이 무척 어려운 나라들이다. 뱅크런으로 자금난에 몰린 스페인은 지난달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그러면서도 2020년 하계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냈다. 이탈리아는 다음 위기의 진원지로 지목되는 나라다. 러시아를 누르고 8강에 오른 그리스는 이미 재정 파탄 상태다.
유로 2012 준결승에서 이탈리아가 독일을 꺾은 지난달 29일,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통 큰 양보를 했다. 그동안 재정위기 국가 정부에만 제공해 온 구제금융을 유로안정화기구(ESM)가 부실 은행에 직접 지원토록 합의했다. 구제금융이 직접 은행에 투입되면 국가부채로 잡히지 않는다. 까다로운 재정긴축 등 구조조정도 피할 수 있다. 독일의 양보로 유럽판 국제통화기금(IMF)인 ESM의 구제금융을 받는다고 스페인과 이탈리아 경제가 금방 살아날까.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한국이 4위를 해 국민을 열광시킨 적이 있다. 그때 나라 밖에서 '외채 많은 나라들의 큰 잔치'라고 비꼬았다. 외채 3위 멕시코가 주최한 대회에서 외채 1위 브라질이 우승했고 준우승은 외채 2위 아르헨티나, 3위는 당시 공산권에서 외채가 가장 많았던 폴란드, 4위가 외채 4위 한국이었음을 두고 한 말이다.
끝내 브라질 등 중남미 국가들은 3년 뒤 1986년 외채 상환 동결을 선언했다. 멕시코는 선진국 클럽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1994년 말 페소화 가치가 폭락하고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외환위기를 맞았다. 1996년 OECD에 가입한 한국도 이듬해 말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에 이르렀다.
축구 등 스포츠가 위로는 될지언정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유로 2012 우승국 스페인의 국채 발행 금리는 마(魔)의 7%를 넘어 사겠다는 이가 없다. 이런 스페인도 5년 전까진 국가부채 비율이 국내총생산(GDP)의 36.3%로 독일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 나라를 재정위기로 몰아넣은 주범은 지방정부다. 재정의 3분의 2를 중앙정부에 기대면서 무상 의료ㆍ교육을 앞다퉈 도입했다. 비행기 한 대 안 뜨는 공항과 대형 문화센터, 수영장을 짓고 철도 건설에 돈을 쏟아부었다. 2008년 금융위기로 경제가 어려워져 지방정부 사업이 부실해지자 중앙정부가 뒤집어썼다. 게다가 주택 대출을 크게 늘린 저축은행들이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파산 위기를 맞자 정부가 막대한 자금을 긴급 투입했다.
어디서 듣던 이야기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벌어지는 일들이다. 호화 청사에 경전철 건설 등 전시성 사업을 벌이다 재정이 거덜 날 위기에 처한 지방자치단체가 한둘이 아니다. 무리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으로 무너진 저축은행에 대한 3차례 구조조정에 공적자금이 투입되고 있다. 국가부채 비율이 32%로 괜찮다고 하는 점까지 스페인과 닮았다.
1997년 말 환란 때는 심각했던 기업 부채와 달리 국가와 가계 부채는 괜찮았다. 그래서 짧은 기간에 IMF 관리 체제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계 부채가 문제다. 국가 부채도 공기업 부채를 더하면 60%대로 치솟는다. 가계 부채를 걱정하면서도 금융 당국은 서로 핑퐁 게임이고, 위기 관리를 지휘해야 할 정치권력 주변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한다. 국가 경제든 가계든 무리한 빚 살림은 결국 탈이 나고 만다. 축구도 경제도 믿을 것은 스스로의 힘이다.
양재찬 논설실장 ja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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