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철에서 장인의 길 찾은 한정욱 나이프갤러리 대표
두음법칙의 세계에서 라이프(Life)는 나이프(Knife)다. 이 남자의 세계는 마치 두음법칙의 세계와 같다. 어릴 적부터 좋아서 수집해 오던 칼이 인생 2막엔 그의 일이자 일상이 됐다. 한정욱(58) 나이프 갤러리 대표를 만나 도장(刀匠), 야장(冶匠)으로서 뜨거운 불길 속에서 꿈틀거리는 붉은 철처럼 역동적으로 살아온 인생 2막을 들었다. 칼과 철에 쏟아온 그의 남다른 열정과 애정이 마치 전기가 통하듯 찌르르 느껴졌다.
인사동 관훈동 쌈지길 맞은 편 골목 ‘刀’자와 ‘劍(칼 검)’자가 크게 쓰여진 간판 아래쪽으로 난 계단을 걸어 내려가니 지하 공간에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종류의 칼들이 전시된 장소가 눈에 들어온다.
입구부터 빽빽하게 장식된 칼과 총기를 한 바퀴 둘러보니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다. 눈짐작으론 도저히 몇 자루가 되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종류도 다양하고 숫자도 많아 보였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의 칼부터 ‘지아이조’에 등장하는 이병헌의 칼 등 유명 영화에 등장한 칼들은 물론 날렵한 일본도와 화려한 장식의 중국칼 등 역사속의 칼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나이프갤러리는 2001년 3월에 문을 열었다. 처음엔 한 대표가 틈틈히 모은 칼 1000여 자루를 갖고 시작했다가 한때 약 6000자루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약간 줄었지만 여전히 수천자루의 칼을 포함해 50여 자루나 되는 창, 그밖에 방패와 총 등 칼과 관련된 품목 수 천여 가지가 전시돼 있다.
초등학교때부터 수집한 칼이 6000여 자루
“아이가 태어날 때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게 뭔지 압니까. 바로 손과 칼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칼을 쥔 손이 나타나 탯줄을 끊습니다. 아이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도구, 그렇듯 칼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도구입니다.” 나이프갤러리 주인 아니랄까봐, 칼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엿보인다.
“칼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아십니까. 우리 생활 속에서만 해도 손톱깎이, 가위, 주방 칼, 낚시나 등산시 사용하는 아웃도어용 칼, 사냥칼, 예식용검, 전쟁용 창칼 등등 정말 다양하죠. 전세계에 존재하는 칼만 해도 약 4만 종이랍니다. 제가 다녀본 결과 나라마다 약 5종 정도는 저마다 고유한 칼이 있더군요.”
칼에 대한 전문성에선 국내에서 한 대표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심지어 살인사건 현장 검증에서도 범죄에 어떤 흉기가 사용됐는지 사진 몇 장만 보고도 알아낼 정도다. 얼마 전엔 약15년 살인사건인 이태원살인사건에 결정적인 범행 단서를 증명해 내기도 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칼을 수집해 왔다. 이상하게도 어릴 때부터 칼이 좋았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리 좋아할 수 있냐, 칼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그냥 좋았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중학교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면서 실전에서 칼을 사용할 일이 많아진 그는 본격적으로 칼을 구하기 위해 동대문과 남대문 군수품 시장을 찾아갔다.
그가 중학생이던 1960년대까지 만해도 국내엔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던 상황, 국내에서 칼이라곤 투박한 대장간 칼이 전부였다. 조금 특별한 칼은 미군부대에서 사용하는 과도와 무기로 사용하는 대검이 전부였다. 아주 희귀한 것으론 공수부대 칼이 있었다. 군수품 시장에 교복차림으로 그가 나타나는 날이면 뒤에서 칼 파는 아저씨가 ‘정욱이 왔나?’하며 슬며시 신제품들을 내보여주곤 했다.
당시 해외에선 중동붐이 일어 건설업을 하던 부친이 외국에 나갈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그를 위해 다양한 칼을 사다주기도 했다. 칼에 대한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는 성인이 돼서도 명동에 나가 칼이나 무기 관련 해외판 잡지들을 찾아 읽어가면서 다양한 칼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사고 싶거나 관심이 가는 칼이 눈에 띄면 관련 내용의 잡지를 오려 칼을 파는 곳의 주소와 연락처를 파악해 뒀다가 나중에 찾아가곤 했다.
“회사를 다닐 땐 툭하면 해외출장 나가려고 혈안이 되곤 했죠. 업무도 업무지만 칼을 구하려고 엄청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해외 친구도 많아요. 칼을 보러 이역만리에서 날아왔다고 하면 어떤 이가 그냥 가라고 하겠습니까. 돈도 없이 비행기 삯만 모으면 무작정 찾아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모른 척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반갑게 맞아주는 것은 물론 칼도 보여주고 먹을 것과 잘 곳도 마련해주고 그날로 친구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알게 됐던 친구들은 지금 그가 나이프갤러리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대기업 근무하다 48세 은퇴 후 나이프갤러리 개관
한 대표는 48세에 은퇴를 했다. 현대그룹에서 광고관련 업무를 맡아왔던 그는 은퇴 전 마지막 1년은 문화일보 인터넷국에 몸을 담았다. “마흔 여덟, 직장인이라면 그때가 고비지요. 많이 은퇴를 합니다. 일반 직장에선 부장에서 이사로 가는 시기가 그때예요. 이사가 되더라도 대부분 롱런을 못하고 나오고 말죠.”
그도 은퇴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지 몰랐다. 60세쯤 은퇴를 하면 서울근교에 전시장 내고 칼을 전시하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초 계획보다 10여년이나 빠른 은퇴였다. “어차피 내걸 해야 한다면 뭘 해야 하나 고민이 앞서더군요. 그만두고 나서 보니 퇴직금도 많지 않고 그냥 놀고먹을 수만은 없겠더라구요.”
은퇴해 해외로 나가서 살고 있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칼을 주제로 한 전시관을 내고자 하는데 도움을 주면 안 되겠느냐고 요청했다. “돈을 벌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 하는 거니까 뛰어들게 됐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칼 1000여 자루를 가지고 친구와 함께 첫 해 일본도를 수입해서 팔기 시작했죠.”
그렇게 1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칼’을 모은 갤러리라서 특이하다 생각한 사람들과 무기에 대한 로망을 가진 남성손님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관람객들은 찾아왔다. 이곳에선 칼 전시도 하지만 판매도 함께 이뤄진다. 가게 안에 1만원짜리부터 3000만원짜리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칼이 전시되고 있다. 칼이 잘 팔리는 지 궁금했다.
“하루에 만 원짜리 칼 5개 팔 때도 있고 1000만 원 짜리 칼을 팔 때도 있어요. 역시 한 달에 만 원짜리 칼 몇 개 팔고 말 때도 있지만 몇 백 만원 짜리 칼 두어 개를 팔아서 천 만원 대 수입을 올리기도 합니다.” 잘 팔릴 때야 걱정이 안 되지만 칼이 전혀 안 팔릴 땐 어떻게 생활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러고 나서 잠시 후 그는 조금 신기한 이야기 하나를 덧붙인다. “칼이 보통은 잘 안 팔리는 데 한 달 내내 하나도 못 팔아 가게세 걱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손 큰 손님이 오셔서 비싼 칼 하나씩 사가서 위기를 모면하곤 하는 식이예요. 칼을 만드는 쇠엔 불과 사람의 피와 땀이 서려있어 흔히 칼을 기(氣)감이 있는 물건이라고들 하는데 아무래도 그런 기운 때문인지 이상하게 힘들다가도 일이 그렇게 풀려 해결 되고 하네요.”
전통철제련 복원에 인생건 현대판 야장(冶匠)
‘나이프갤러리 대표이사’외에도 한 대표에겐 또 다른 직함이 있다. ‘전통사철제련장·도장’이 바로 그것이다. 한 대표에겐 이를 나타낼 각각 다른 두 가지의 명함이 있다. 현재 갤러리 대표 운영자로서 대외적으로 나설 때 내보이는 명함과 전통방식으로 철을 만들고 칼을 만드는 장인으로서 내놓는 또 다른 명함이 존재한다.
갑자기 그가 볼펜을 찾더니 한자로 된 두 글자를 명함에 적어 넣는다. ‘야장(冶匠)’, 그리고 한글로 ‘환도장’이란 말을 연달아 적는다. “칼날이 있으면 그 끝에 고리를 붙였는데 그것을 환도(還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사용하던 칼을 통칭해 환도라고 하죠. 이걸 만드는 사람들 환도장이라고 하구요. 그런 환도, 즉 칼을 만드는 재료가 강철입니다. 그리고 강철을 만드는 사람을 야장(冶匠)이라고 합니다.”
그는 칼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쇠, 철(鐵)에 관심을 갖게 됐다. “조선말기 제철소라는 것이 들어오면서 전통적으로 제철을 하는 야장이라는 이름이 사라졌습니다. 이 업을 되살려 보고 싶었어요.” 그가 전통 철을 만드는 이를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데는 한 인물의 힘이 컸다. 북촌(北村) 김익홍 동산불교대 교수였다. 그는 2008년 작고했다.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철엔 두 가지가 있는데 철광석과 또 다른 하나는 사철(砂鐵)이 있다더군요. 철광석은 포항제철 같은 곳에서 용광로에 넣고 녹여 철판을 만드는데 그런 철은 강철이 아니고 선철이라고 합니다. 휘어지는 철이요. 강철은 사철(砂鐵)에서 나오는 겁니다. 모래에서 나는 철이죠. 우리 조상들은 사철을 내려 제련을 해서 칼을 만들었던 거예요.”
그날로 그는 <세종실록지리지> 사료에 의거해 사철이 난다는 감포에서 철을 채취해 전통방식으로 제련을 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경기도 양주에 전통방식으로 단순하게 만들어진 제련로를 설치하고 철을 녹일 만큼 고온의 불꽃을 만드는 소나무 숯을 사용해 사철에서 순수한 철을 분리해냈다. 소나무는 최고 2000℃까지 열을 낸다. 하루 17시간이나 걸리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렇게 쇠를 내려서 그 쇠를 약 15번 접으면 3만2000겹의 얇은 층으로 이뤄진 단단한 강철이 나옵니다. 이 방법은 국내에선 성공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저는 20여회를 시도해 거의 90%를 성공했습니다. 우리나라 야금사(冶金史)를 처음으로 쓴 노태천 충남대 교수는 전통방식으로 철을 내리는 과정을 보시고 감동하셔서 일생에 이렇게 흐뭇한 순간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한 대표는 재작년부터 전통철 제련법을 전통문화재로 등록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 문화재 등록을 하려는 과정에서 처음엔 심사과정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종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최고의 책인 <경국대전>을 찾아 야장(冶匠)에 대한 부분을 찾아 관계 공무원과 심사위원들을 설득했다. 두꺼운 관련 서류를 챙기고 직접 제련로와 철 등 무게만 100kg이 넘는 준비물을 챙겨 관련 부서와 심사장 문을 두드린 결과 올해 심의를 통과해 마지막 절차인 서류심사를 남겨두고 있다.
책도 한 권 냈다. <칼과 철>(시몽 펴냄, 2010)이란 책이다. 그동안 사철로 강철을 만들고 칼을 만드는 전 과정을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은 “한정욱 장인의 철기문화 핵심을 이루는 전통사철 제련 작업과 이를 이용해 제작한 전통 도검의 복원작업은 실로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중차대한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한 대표는 이 작업에 많은 시간과 비용, 자신의 열정과 땀을 투자했다. 지금까지 들인 비용만 해도 무려 20억원. 철과 칼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열정이 아니면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지난해엔 충청남도 무령왕릉과 그 일대지역에서 출토된 환두대도를 복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는 제철 강국입니다. 철강은 전세계 1위입니다. 지금 우리가 만드는 자동차, 선박, 반도체, 전자 등 모두 철에서 나온 산업입니다. 과거에도 우리는 철에 있어 1등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DNA속엔 철이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예비 은퇴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다. “1막은 남을 위해 살지만 2막은 자기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한번 살다가는 인생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후배들에게 30대부터 2막을 준비하라고 얘기해줍니다. 수집을 하면 좋은데 되도록 황당하지 않으면서도 특이한 것을 수집하라고 합니다. 최대한 작고 깊게 한 20년간 수집하다보면 그 분야에 귀신이 돼죠. 그러면 은퇴 후엔 저처럼 갤러리나 박물관도 낼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이코노믹 리뷰 김은경 기자 kekisa@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