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일자리 창출 일흔 두살의 열정 ‘실버들’ 권영록 대표
세상은 그에게 말한다. 이제는 그만 쉬어도 될 나이 아니냐고. 그러나 그 자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라도 해볼만 하다고. 그의 나이 일흔 두 살, 은퇴를 하고 쉬면서 인생을 마무리 하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쉬어도 봤지만 너무 무료했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쉬라는 건 한 아직 뭔가 도전할 수 있다는 열정을 품은 그 같은 사람에겐 너무 가혹한 일이다.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다면 그가 할 일은 세상에 무궁무진하다.
그는 자신을 위해,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인생2막을 시작했다. 노인 심부름센터로 시니어 일자리 창출에 앞장서고 있는 ‘실버들’의 권영록(72) 대표를 만나 20대 청년 못지않은 젊은 생각과 황혼녘 아름답게 불타는 노을과도 같은 열정적인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보세요. 여긴 대구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시각장애인이신데 여기 대구시내는 눈이 안보여도 다니실 수 있지만 서울에선 전혀 길을 찾을 수 없어서요. 급히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는데 제가 거기까지 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오셔서 저희 아버님을 대신 병원에 모시고 가주실 수 있는지요?”
“혼자 사는 20대 여성입니다. 이사 온지 얼마 안 돼 집안에 못을 박아야 하는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회사 점심시간에 잠깐 와서 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아버지 같은 분이 오셔서 해주시면 좀 안심이 될 것 같습니다.”
“심부름센터죠? 아이 둘을 키우는 맞벌이 부부입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려고 하는데 경쟁도 치열하고 바빠서 시간도 없고, 저희 대신 줄 좀 서 주실 수 있나요?” 사무실에 문의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건 주인공들은 저마다 난처한 부탁거리를 가진 사람이다. 영등포시장역 2번 출구 바로 앞에 위치한 ‘실버들’ 사무실에서 매일 벌어지는 풍경이다.
‘실버들’은 65세 이상의 노인들이 직원으로 일하는 노인심부름센터이다. 노인일자리와 조선족 일자리 알선 사업도 겸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심부름 업무를 주로 한다.
이곳에서 권영록 대표와 상담사 2명, 심부름 등을 하는 직원까지 총 7명이 근무를 하고 있다.
“실버들은 2010년 문을 열었습니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젊은이들이 운영하는 심부름업체에 비해 건수가 많이 발생하고 있지는 않지만 노인이 젊은이들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여기는 분들이 업무를 맡긴 후 만족해서 또 찾아주시곤 합니다.”
권 대표는 왜 ‘실버들’을 만들게 됐을까.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 그는 SN미디어라는 홍보회사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했다. 마침 아내도 몸이 아파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이 필요했다. 서울의 집과 재산을 모두 정리해 파주로 이사를 했다. 공기도 좋고 아파트 주변에 야트막한 야산과 논밭 등 녹지가 많이 형성돼 있어 은퇴 후 건강하고 편안한 노후생활을 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처음엔 괜찮았다. 40여 년 간 회사생활이다 사업이다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지내다 맞은 은퇴 후 휴식은 꿀처럼 달콤했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좀이 쑤셨다. 뭔가 할 일이 없을까 찾아다녔다. 우선 도서관에 나갔다. 도서관에서 컴퓨터도 하고 책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파주노인복지관에서 일자리를 하나 마련했다. 전산업무를 보는 업무였다. 하루 4시간을 일하면 30만 원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곳 일을 하면서 그는 노인 일자리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 ‘실버들’이 추구하는 기업이념으로 ‘노인의 생활안정’과 ‘노인복지 구현’에 중점을 두게 된 것도 모두 이때의 경험에서 나오게 됐다.
일본의 ‘시니어센터’ 성공사례 접하고 창업 결심
“복지관에서 일을 하면서 보니 노인일자리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생계형’으로 은퇴를 해도 실질적으로 생활을 위해선 돈벌이를 해야 하는 경우입니다. 이들은 하루 일당이라도 벌어야 생활이 가능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과거 견문과 노하우를 갖고 있는 노인들로 여전히 사회에 재능기부 등을 통해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젊었을 전문직 영역에 있었던 사람들로 얼마든지 재능을 발휘하고 일을 할 수 있는데 기회가 없어 노후를 무료하게 보내는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문에서 소개된 일본의 ‘시니어센터’ 사례 기사를 접하게 됐다. 일본에선 시니어워크센터라는 것이 있어 노인의 일자리문제가 원스톱 시스템으로 해결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야말로 정말 ‘이거다’ 싶었다.
국내 실정에 맞는 원스톱노인일자리 센터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자본금은 5000만원으로 시작했다. 은퇴하고 수중에 있었던 자금과 가족 몰래 은행에서 받은 신용보증금 2000만원을 합쳐 마련한 자금이었다. 사무실을 마련하고 직원들을 고용한 후 ‘나우리’라는 상호로 회사를 설립했다. ‘나와 우리의 공동체’라는 의미와 ‘나누고 돕는다’는 두 가지 의미가 결합된 사명이다.
그리고 ‘실버들닷컴’이란 이름으로 노인일자리와 관련된 구인구직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다. 구인업체나 인력중개인들은 이 사이트를 유료로 활용해야 하지만 노인 구직자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일자리의 두 가지 측면에 따라서 생계를 위한 노인 구직자들을 위해선 전문지식이나 기술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심부름 업무부터 경비, 택배, 제조업, 사무보조 등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전문직 출신자거나 고학력 구직자들의 경우엔 그들에 맞는 통·번역, 마케팅, 홍보 등 전문성을 요구하는 분야에서 일할 수 정보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권 대표는 “실버들은 과거 산업 역군이 노인들이 각자의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제공, 알선하는 실버워크 시스템을 적용해 노인들에게 생활안정과 일하는 기쁨을 드리는 공동체를 지향한다”며 “몸 건강하고 언제든 뛸 수 있다면 나이가 많더라도 사소한 심부름부터 통번역, 마케팅 전문적인 업무까지 일할 기회를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다양한 경력과 경험 토대 늘 새로운 도전
권영록 대표가 일흔의 나이에도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젊은 시절 다양한 업종에 두루 도전하며 다양한 경력과 경험을 쌓아왔기에 가능했다. 대학시절 영문학을 전공했던 그는 대학졸업 후 전공을 살려 영자신문사 기자를 하려고 준비하던 중 친척이 운영하는 운송회사에 취직하게 됐다. 서울역 뒤에 위치했던 운송회사에서 맨 처음 맡았던 업무는 창고 업무였다.
그는 그곳에서 업무에 빠르게 적응한 결과 3년 만에 창고담당 총무직을 맡으면서 운송업의 전체적 윤곽을 그릴 수 있었고 물류 등 유통분야에 훤해질 수 있었다. 일이 적성에 맞고 흥미롭다고 생각됐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친구가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앨범 한권을 들고 찾아왔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파노라마식 앨범이었다. 국내에선 끈적끈적한 풀을 붙여 사진을 붙이던 시절이었다. ‘이거 아이디어다’란 생각이 들었다. 하던 일을 접고 앨범 제작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일본은 한국보다 몇 십 년을 앞서가던 시절이었다. 시기상조였다. 결국 앨범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이디어가 많은 편이다. 사교성도 좋고 사업수완도 좋아 곧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발굴했다. 이번엔 아파트에 들어갈 광고지 제작 일에 뛰어들었다. 당시 반포아파트가 막 들어설 때였다. 그때 만든 책자가 ‘상가로’였다.
이후 그는 광고대행사를 설립해 오랫동안 운영하다가 1980년대 후반 무렵 소비자협동조합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당시 국내에 선공무원매장이나 지하철매장과 같은 연금매장이 활성화 되던 시기였다. 전망이 있겠다 싶어 서대문조합을 구성해 300여평 규모의 복지매장을 냈다. 복지매장을 하면서 <쇼핑뉴스>란 타블로이드판 신문 만드는 일도 함께 했다.
그러나 인생은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 직원의 불찰로 복지매장 사업은 부도를 맞았다. 모든 게 무로 돌아갔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때가 1995년 무렵이었다. 제로베이스 상태에서 그는 SN미디어라는 홍보회사를 세우고 은퇴직전까지 운영해왔다. 다양한 업무 경험과 조직생활 속에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그는 늘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왔다.
그는 ‘실버들’도 같은 시각으로 봐 달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연이어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이 분야 저 분야 전전해온 거 아니냐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 나이에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실패를 모면하기 위해 새로운 일을 찾은 게 아닙니다. 일을 워낙 좋아하고 새로운 일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아온 것입니다.”
“원스톱 노인일자리 시스템 정착 밑거름 될 것”
그는 앞으로 “몸이 (건강을)허락할 때까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궁극적인 꿈은 ‘실버들’을 대한민국의 명실상부한 원스톱노인일자리센터로 키워 전국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종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향후 3~5년 정도는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실버들’은 현재 사회적 기업 형태로 가기 위해 지난해 ‘개인사업자’에서 ‘주식회사’로 전환됐다. 권 대표는 ‘실버들’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공익성이 있는 공동체 또는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사회적 기업 형태로 하고 다양한 사업들을 수주해 노인들에게 직접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실버들’사이트를 찾아 한번이라도 일을 했던 노인들은 약 500명쯤 된다. 권 대표는 이사업을 하면서 “사람을 모으기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이 사업을 해면서 몸무게가 4kg이나 빠졌다. 그러나 이젠 웬만한 토대가 갖춰졌다. 지점도 은평구, 부천시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10여개나 생겨났다.
“지금 현재 노인복지와 일자리에 쓰이는 예산은 각 부처와 기관으로 내려오면서 누수가 발생해 실제 노인들에게 돌아오는 혜택이 그만큼 줄어드는 게 현실입니다. 더 많은 노인들이 안정적이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노인사업이 민간에서 많이 활성화돼야 합니다.” 권 대표는 지금 하는 일을 ‘사명’이라고 말한다. 그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엔 못 미치더라도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난다. 오전 출근시간까지 노인 일자리가 될 만한 것들을 찾기 위해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고 개인블로그에 ‘실버들’홍보를 위해 글을 올리기도 한다. 앞으로는 일자리 사업의 대상을 조선족으로 확대해 사업성도 함께 갖춰나갈 계획이다. 그가 사명으로 여기는 노인일자리 분야의 원스톱시스템을 갖춰기 위해서 ‘실버들’사업을 좀 더 긴 안목에서 끌고 나가기 위한 복안이다.
권 대표는 ‘실버들’은 현재까지 크게 활기를 띠진 못했지만 앞으로 더 많은 성장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보고 활성화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코노믹 리뷰 김은경 기자 keki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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