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코드 인사' 수혜자다
[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 있는 '강북 문화의 상징' 세종문화회관의 사장 자리는 언제나 순환보직 공무원과 기업 전문경영인(CEO)들의 차지였다. 아시아 최대인 3022석 규모의 대극장 등 4개의 공연장과 2개의 전시장을 보유하고 국악관현악단, 무용단, 오페라단 등 총 9개의 예술단을 거느리고도 세종문화회관이 그 동안 콘텐츠 부재와 침체에 허덕이며 후발주자인 예술의 전당에 밀려 '넘버 2'의 자리에 머물렀던 이유다. 지난달 1일 부임한 박인배 세종문화회관 사장(59)은 "철저한 검증을 거쳐 예술단이 괄목할 수준의 성장을 이룰 때까지 대극장 대관을 더 많이 할 것"이라면서 "세종문화회관은 물이 흘러들어오고 나가는 저수지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물리학 전공자인 그는 "기초 과학과 기초 예술 공히 창의적 사고가 필요하다"면서 "기초 예술 분야도 기본적으로 합리성을 벗어나면 창작이 불가능하다"는 말로 물리학과 예술의 융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3일 오후 세종문화회관에서 박인배 사장을 만나 그의 '해법'을 들었다.
-부임한 지 이제 한 달이 넘었는데 소감은.
▲업무 파악은 대략 마쳤다. 부임 전에 직무 수행 방향을 설정했으니 이제 실행만 하면 된다. 이전에는 세종문화회관이 공연장과 예술단 운영에만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서울시 여러 자치단계들과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내려고 한다. 구성원과 합의해서 일하겠다.업무 추진과 공연단의 창작은 합의가 안된다면 상부의 지시로 여겨지고, 업무 과중에 따른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난달 17일 기자회견에서 재정자립도와 수익성보다는 예술 성과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했다.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는데.
▲내가 언급한 예술은 사회 전체의 예술 생태계다. 아마추어들이 만든 여러 공연물들도 세종문화회관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돈이 많이 들 수도 있지만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참여한다면 적은 돈으로도 창작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수 있다. 예산 충당 부분이 걸리지만 자립도에 크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다. 세종문화회관의 재정 자립도는 약 37~38% 정도다. 이 수치를 70%까지 올리라고 해도 당장 채울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이런 것으로 경영성과 평가를 하겠다면, 못 채우고 내가 성과급 안 받으면 된다. 앞으로 세종문화회관은 물이 흘러나가고 흘러 들어오는 저수지 역할을 할 것이다.
-대극장이 너무 크다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3022석 대극장을 채울 수 있는 공연은 철저히 대중적이어야 한다. 대중성을 획득하려면 검증된 작품이 들어와야 한다. 회관 산하의 예술단 공연이라고 해도 충분한 검증 과정을 거치겠다. 제작비를 많이 들인다고 해서 성공 확률이 꼭 높은 것은 아니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수익을 올릴 때는 엄청나지만, 망할 때는 크게 망한다. 철저한 검증을 거쳐 예술단이 괄목할 수준의 성장을 이룰 때까지 대극장은 대관을 더 많이 할 것이다. 불가능한 부분까지 무리하게 기획할 필요는 없다.
-영화관들처럼 멀티플렉스화(化)하는 것도 방법일 텐데.
▲세종문화회관은 2002~3년에 리뉴얼했다. 그 때 잘못했다. 문화 취향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3022석에 하나의 취향을 몰아넣으려고 한 것이다. 이는 권위주의 시대 폐해의 전형이다. 세종로는 예전부터 '광장(廣場)' 기능을 한 곳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고 육조 거리가 된 이후, 만민공동회니 동학 교주 신원운동이니 많은 집회들이 세종로에서 일어났다. 최근월드컵이나 촛불집회처럼 광장의 기능을 하고 있는데도 일상의 이미지는 그렇지 못했다. 앞으로 세종문화회관을 포함한 세종로 이웃한 지역을 축제의 공간으로 바꾸겠다. 계절 별 축제 개념으로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모든 공연장의 작품들과 야외 전시품을 그 주제로 배치하겠다. 민간 예술 단체의 참여가 매우 중요하다.
-낙하산인사, 코드인사 등 이번 인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박인배 사장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책자문위원회 문화,환경 분과위원장 출신이다)
▲박 시장의 코드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 코드가 과거에 충성한 사람들을 심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이라면 나는 박원순의 코드 인사가 아니다. 그의 코드가 적재적소에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심는 것이라면, 박원순의 코드 인사가 맞다. 세종문화회관 사장 추천위원회 추천으로 몇 사람이 후보로 올라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코드 인사로 비난받을 것이라고 걱정했다고 하더라.
-전문경영인이 아닌, 현장 예술가 이력에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전문경영인 출신 전임 사장들이 공연에 대한 인식없이 의사 결정을 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경영도 전문 분야가 있다. 전문 경영인 출신이라고 해서 공연 예술 경영을 다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정육점 잘 하는 사람에게 과일 장수 하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좋은 공연과 나쁜 공연, 공연장의 규모ㆍ기획사 시스템 등 공연 전반을 알아야 거래를 하고 조직을 운용할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의 현재 브랜드 파워를 어떻게 평가하나.
▲극장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데는 여러 지표가 있다. 규모로 보면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 전당, 국립극장 이렇게 세 곳이 대표다.접근성은 세종문화회관이 제일 낫고, 음향은 가장 늦게 지은 예술의 전당이 최고이며, 컨텐츠는 3사 모두 들쑥날쑥 하다. 컨텐츠의 좋고 나쁨은 철저히 관객의 취향이 좌우한다. 1990년대 말에 국가문화정책 차원에서 국ㆍ공립 공연장의 특성화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 국립극장이 전통을 재창작하는 작품 중심이라면 예술의전당은 서양 장르 중심으로 특성화해 국립극장 소속이던 발레단과 오페라단, 합창단이 예술의 전당으로 보내졌다.세종문화회관은 서울시향을 빼고 모든 예술단을 보유하고 있어 특성화 영역에서는 자유롭다.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든 대학로 연극인들을 위한 해법이 있나.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창작 환경은 좋아졌다. 연극인들이 창작 환경 변화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흥행이 아닌, 창작 중심 연극을 하려면 공동체 연극이나 지역 주민과 공동 작업하는 등 지역 현장 연극에 많이 참여해야 한다. 서울문화재단도 자치구 문예회관 레지던스 프로그램 등 다각도로 지원을 하고 있다. 정책 환경 변화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현재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ㆍ외부 구성원들과 많이 소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서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하루종일 사람들을 만나고 퇴근해서 집에 가면 입에서 단내가 난다. 혼자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생각이 들 정도다. 효과있게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을까가 항상 고민이고 걱정이다.
박인배 세종문화회관 사장 프로필
▲1953년 부산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사 ▲한국민족극운동협회 이사장 ▲극단 현장 예술감독 ▲과천마당극제 예술감독 ▲안성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 예술감독 ▲노래극 '노동의 새벽', 야외총체극 '자, 우리 손을 잡자', '노래판굿 꽃다지', 백범김구 창작뮤지컬 '못다한 사랑', MBC 마당놀이 '토정비결' 등 연출.
태상준 기자 birdcage@·사진_양지웅 기자 yangd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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