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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70년대 서울 동숭동은 아름다웠다. 요즘의 대학로와 마로니에공원 일대다. 이제는 복개돼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혜화동 쪽에는 흘러내려오는 개천이 있었고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보도를 아름답게 물들였다. 종로5가에서 서울대 문리대 앞을 지나 혜화동 로터리까지 가는 길은 가난한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였다.
1970년대 중반 서울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들이 관악 캠퍼스로 몽땅 옮겨 가기 전까지 동숭동은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보금자리였다. 문리대 앞을 흐르는 개천을 세느(센)강, 개천을 건너 문리대로 들어가는 다리를 미라보다리로 불렀다. 그 시절 프랑스 파리는 동경의 도시였다. 교정 입구에서는 마로니에 나무가 학생들을 반겼다. '동숭동 시대'에는 낭만이 있었다. 수시로 최루탄 가스가 뒤덮곤 했지만.
스포츠계에도 '동숭동 시대'가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50여 년 전으로 날아가 본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은 태릉선수촌 건립 등 한국 스포츠 역사에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대회였다. 이웃 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한국은 당시로는 대규모인 224명(임원 59명, 선수 165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직전 대회인 1960년 로마 올림픽에 67명의 선수단(임원 31명, 선수 36명)이 출전했으니 도쿄 올림픽에 대한 전 국민적인 관심을 헤아릴 수 있다.
이에 따라 대한체육회는 대회 준비를 위해 특별한 대책을 내놓았다. 대회를 2년여 앞둔 1962년 '우수선수 강화 훈련단'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1963년 1월 31일 국민회당(현재 서울시 의회)에서는 임원 63명, 선수 233명 등 386명으로 '우수선수 강화 훈련단' 결성식을 가졌다. 요즘으로 치면 태릉선수촌에 입촌할 종목별 국가 대표 선수단을 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선수들을 수용할 시설이 당시 마련돼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체육회는 동숭동 소재 건물(대지 212평, 건평 156평, 옛 서울대 문리대 뒷편)을 매입해 합숙 훈련을 실시했다. 1963년 6월 개소한 동숭동 합숙소는 그해 10월 여자부 숙소를 마련했고 이듬해 3월 서울운동장에 체력훈련장을 개장했다. 태릉선수촌처럼 선수 숙소와 훈련 시설이 한 울타리 안에 있진 않았지만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있어서 그 시절 나름대로 종합 훈련 센터로 구색을 갖췄었다. '동숭동 시대'는 1966년 6월 28일 태릉선수촌(서울 공릉동 소재 대지 9786평, 건평 540평)이 개장하면서 3년여의 짧은 역사를 마감한다.
'우수선수 강화 훈련단'은 도쿄 올림픽에 대비해 1963년 2월 1일부터 대회 직전인 1964년 9월 30일까지 4단계에 걸쳐 지속적으로 강화 훈련을 펼치며 종목별로 전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데모 등 당시 어수선한 정치 상황 때문에 훈련은 물론 국가 대표 선수 선발 대회까지 중단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도쿄 올림픽은 1964년 10월 10일부터 24일까지 94개국 5천여 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출전 선수들은 19개 종목, 163개 세부 종목에서 기량을 겨뤘다. 유럽과 미국이 독점해 온 올림픽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었다는 데 의의가 있는 대회였다.
한국 선수단은 재일동포들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받으면서 종목별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목표했던 금메달은 획득하지 못했고 정신조가 복싱에서, 장창선이 레슬링에서 각각 은메달을 차지했다. 유도에서는 재일동포 김의태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정신조는 밴텀급 결승전에서 사쿠라이 다카오에게 2라운드 1분10초 만에 RSC로 졌고 장창선은 자유형 플라이급 결승전에서 요시다 요시가츠에게 판정으로 패했다. 김의태는 80kg급 준준결승까지 3경기 연속 한판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으나 준결승전에서 오카노 이사오에게 판정패했다. 세 선수 모두 금메달로 가는 길목에서 홈의 이점을 안고 있는 주최국 일본 선수들과 마주쳐 아쉬움이 컸다.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국가 대표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종합 훈련 센터의 필요성이 다시 한 번 제기됐고 드디어 1965년 11월 서울 공릉동 일대 9786평의 임야에 3300여만 원의 예산으로 태릉선수촌이 착공됐다. 이듬해인 1966년 6월 문을 연 태릉선수촌의 첫 번째 성과는 그해 12월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였다. 1962년 제4회 자카르타 대회까지 종합 3위의 벽을 넘지 못하던 한국은 방콕 대회에서 개최국 태국을 제치고 처음으로 종합 2위에 올랐다. 메달도 복싱과 사이클, 사격, 역도, 탁구 등 종목별로 고르게 나왔다. 태릉선수촌의 위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태릉선수촌은 한국 스포츠의 요람으로 수많은 우수 선수를 길러 냈다. 지난 27일 진천선수촌이 문을 열었다. 2017년 진천선수촌 2단계 공사가 끝나면 태릉선수촌에는 동계 종목 선수들만 남게 된다. 그리고 언제인가는 문화재 지역인 태릉을 떠나게 될지 모른다. 한국 엘리트 스포츠는 '동숭동 시대'부터 시작해 태릉선수촌 시대를 거쳐 진천선수촌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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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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