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곳 하나 모난 구석이 없는 얼굴처럼 차태현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늘 둥글둥글하고 편안한 남자였다. 여자 친구를 위해서라면 작고 높은 하이힐도 마다하지 않고 신어주는 착한 남자친구(영화 <엽기적인 그녀>), 삭막한 병원이라도 그가 나타나면 환자도 의사도 웃을 수밖에 없는 재간둥이 의사선생님(MBC <종합병원>), 갑자기 불쑥 찾아온 딸과 손자와 티격태격 싸우다가 어느새 정들어버린 철부지 30대 할아버지(영화 <과속스캔들>)까지 차태현이 차려입은 옷은 이상하리만큼 부담스럽지도, 밉지도 않았다. 하지만 점점 대작들이 쏟아지는 외부 환경, 하나의 길 위에서 매번 다른 발자국을 보여줘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이 겹치면서 차태현은 이제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힘들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과한 슬랩스틱 없이도 밝고 유쾌한 모습을 보여주던 차태현이 이번 영화 <챔프>에서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 등장한다. 눈을 다친 기수와 발을 다친 말이 불가능에 도전한다는, 눈에 빤히 보이는 스토리임에도 후반부로 갈수록 눈물을 쏙 빼는 힘은 결국 차태현으로부터 나온다. “동물 나오지, 애 나오지, 소재는 스포츠지, 세 가지를 다 섞어놓으니까 이건 정말 하루하루가 나와의 싸움이었다. 말과 아이와 상관없이 내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정말 이 영화는 안 망했으면 좋겠다. (웃음)” 10개월 동안 승마를 배운 결과, 일명 ‘몽키자세’를 대역 없이 소화할 만큼 능숙하게 말을 탔고 그 위에서 승호는 우박이(말)와 정서적인 교감을 나눴다. “다른 감동적인 장면보다 내가 말 타는 장면만 나오면 그렇게 벅차고 슬플 수가 없었다”는 차태현의 말은 절대 엄살이나 투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코미디보다 이야기로 앞세운 <챔프>처럼, 다음은 차태현이 직접 고른 ‘이야기의 힘이 느껴지는 영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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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생은 아름다워> (Life Is Beautiful)
1997년 | 로베르토 베니니
“<인생은 아름다워>는 진짜 재밌게 본 영화예요. 극 중 귀도의 모습은 제가 가장 추구하는 연기 중 하나예요. 어떤 장면이든 본인은 즐겁게 웃고 있는데 보는 사람은 슬퍼서 환장하잖아요. (웃음)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전쟁이 마치 게임인 것처럼 속이는데, 결혼 전에 이 영화를 봤을 때도 울컥했는데 지금은 아들까지 있으니까 다시 보면 더 슬플 것 같아요. 지금 이런 연기를 하라고 하면 아무래도 아이를 키운 경험이 있으니까 잘할 수 있겠죠.”
죽기 전에 꼭 한 번 봐야 할 명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더 이상의 수식어는 필요 없다. 잔인한 전쟁과 해맑은 게임 장면이 교차할 때마다 입은 웃고 있으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다.
2. <클로버필드> (Cloverfield)
2008년 | 맷 리브스
“남들은 의외라고 할 수 있는 선택인데, 카메라 기법이 정말 쇼킹했어요. 시종일관 핸드헬드 기법을 쓰면서도 나올 장면은 다 나오잖아요. 카메라가 흔들리면 토할 것 같아서 보기 싫은 영화도 있는데, 이 영화는 끝날 때까지 그런 기분을 전혀 못 느꼈어요. 계속 긴장감을 유지하고. 와,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싶었어요. 알고 봤더니 엄청 유명한 감독이더라고요. 별명이 낚시의 제왕이라면서요? 하하. 그 얘길 들을 만한 것 같아요.”
일본으로 떠나는 친구를 위해 송별회를 하던 날 밤, 뉴욕 한 가운데에 정체불명의 거대괴물이 등장한다. 송별회 현장을 찍던 캠코더는 이후 혼란스러운 맨해튼 시내를 구석구석 담아내기 바쁘다. 러닝타임 85분을 핸드헬드 촬영으로 꽉 채운 탓에 도중에 영화관을 뛰쳐나간 관객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3. <미스트> (The Mist)
2007년 | 프랭크 다라본트
“괴수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미스트>는 진짜 재밌게 봤어요. <고질라> 같은 류의 영화를 보다가 <미스트>처럼 괴물이 보이지 않는 영화를 접하니까 새롭더라고요. 특히 아버지의 입장에서 마지막 장면을 보고 정말 놀라서 많이 울었어요. 본인이 자살하는 것도 싫고 아들이 괴물한테 당하는 것도 싫어서 그런 괴로운 결정을 내렸는데, 아빠의 마음이 너무 이해되니까 막 미치겠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허무한 결말에 욱하면서 나갈 수도 있겠지만, 저한테는 그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어요.”
괴물과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건 안개뿐이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괴물의 무자비한 공격에도 맞서야 하며, ‘지금 밖으로 나가면 모두 죽는다’는 예언자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심리를 공포의 소재로 삼은 영화.
4. <디스트릭트 9> (District 9)
2009년 | 닐 블롬캠프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을 갖고 만든 영화였는데, 결국 이야기가 좋으면 작품이 잘 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디스트릭트 9>에서는 외계인이 되게 불쌍하게 나와요. (웃음) 우주선이 고장 나는 바람에 올라가지 못하고 지구인들과 지내야 되는데 얘네가 너무 어리바리한거죠. 그리고 사람이었던 주인공은 결국 감염 때문에 외계인이 되는데, 마지막에 혼자 남는 모습을 보니까 진짜 불쌍하더라고요. 눈물이 다 날 정도였어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떨어진 우주선. 상대적으로 낯선 장소에 불시착한 외계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디스트릭트 9>은 28년 동안 ‘디스트릭트 9’에 수용된 채 인간의 통제를 받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남아공에서 자행됐던 인종격리정책 등 사회적 문제를 가볍지 않게 다룬 영화다. 그동안의 SF대작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적은 3천만 달러의 예산으로 제작됐지만, 미국에서 개봉 첫 주 만에 흥행 1위를 기록했다.
5. <폰 부스> (Phone Booth)
2002년 | 조엘 슈마허
“굉장히 협소한 공간에서 촬영한 작품인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정말 탄탄해요. 한정된 공간이라 이야기가 자칫 지루하게 흘러갈 수 있는데, 키퍼 서덜랜드라는 배우가 목소리 하나만으로 기가 막히게 연기를 하거든요. 영화 채널에서 이 영화를 방영해 줄 때마다 챙겨봐요. 그만큼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죠.”
좁은 공간에 갇힌 사내가 매 초마다 느끼는 두려움, 공포에 질린 거친 숨소리가 화면 밖에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우연히 공중전화를 받게 된 스투(콜린 파렐)가 “전화를 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에 사로잡히는 내용의 <폰 부스>는 공중전화박스라는 밀폐된 공간을 십분 활용한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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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남우주연상을 한 번도 못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 분들의 눈높이에 맞추고 싶진 않다. 오히려 관객들한테 인정받는 게 낫다. 2009년 초에 맥스무비에서 <과속스캔들>로 최고의 남자배우상을 받았는데, 정말 뿌듯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차태현이 몰고 가는 공의 골인지점은 여전히 코미디를 향해 있다. “가장 큰 목표는 두 시간동안 미친듯이 웃고만 나오는 영화를 찍는 거다. <덤앤더머>처럼 뒤끝도 없고 감동도 없고, 내가 도대체 뭘 봤나 아무 생각도 안 나지만 정말 시원한 그런 영화 있지 않나.” 언젠가 차태현표 <덤앤더머>가 개봉했을 땐 관객의 박수와 함께 그의 손에 트로피 하나가 들려있길 바란다.
10년 넘게 오로지 한 길만을 고집하는 배우가 있다. 만약 그가 학생이었다면 우등상은 둘째 치고 개근상이라도 받아야 마땅하지만 트로피를 손에 쥐기는커녕, 올해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딱 한 번 오른 게 고작이다. “코미디가 너무 평가 절하되어 있다”고 속상해하면서도 “내가 가장 잘하는 영역이자 관객들이 원하는 부분”이라며 절대 코미디를 포기하지 않는다. 10년 전에 개봉했던 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여전히 본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배우가 대표작이 하나라도 있는 게 어디냐”라고 허허 웃는다. 심하게 낙천적인 남자, 바로 차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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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이가온 thir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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