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문학 중년 김재철의 낭독의 발견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4분 18초

지난 며칠 간 MBC 김재철 사장의 사의 표명과 번복, 그리고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의 재신임을 두고 세상이 시끄러웠다. 처음 사표 제출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그 배경이 궁금했다. 김우룡 방문진 이사장의 ‘쪼인트’ 발언을 시작으로 MBC 노조 총파업, 주요 시사 교양 프로그램 폐지 및 진행자 교체, 그리고 최근 배우 김여진의 <손석희의 시선집중> 출연 불가 사태까지 갖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뚝심 있게 자리를 지키던 그였기 때문이다. 이에 내년 총선 출마설, 문화부장관 내정설 등이 떠돌았으나 김재철 사장은 사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입장을 번복했다. 그는 왜, 무엇을 위해 이런 쇼를 벌이며 또 한 번 논란의 중심에 섰나. 지난 2010년 2월 사장 취임 후 1년 6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역대 그 누구보다 인상적인 족적을 남기고 있는 김재철 사장을 그가 남긴 주요 발언과 맥락을 통해 점검해보았다. 스스로는 솔직 혹은 소탈하다고 여길지도 모를 과감성과 의외의 문학적 감수성마저 가미된 ‘김재철 어록’이다.


문학 중년 김재철의 낭독의 발견
AD

김재철 사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고려대학교 출신으로 1979년 MBC 보도국에 입사해 보도제작국장, 울산 MBC 사장, 청주 MBC 사장 등을 역임했다. 국회 출입기자 시절부터 당시 국회의원이던 이명박 대통령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김재철 사장은 엄기영 전 MBC 사장이 선임된 2008년에도 사장 후보에 응모했다. 당시 노조가 그의 친 한나라당 성향을 문제 삼자, 전 사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저와 MB는 부인할 수 없는 관계”라고 인정한 바 있다. 2010년 다시 MBC 사장 자리에 도전한 그는 MBC 대주주인 방문진과의 면접을 마치고 나오면서 “(이명박 대통령과) 한 번 쌓은 친분은 끝까지 간다”고 웃으면서 대답하기도 했다. 김재철 사장은 면접 자리에서 “외부인사를 영입해 ‘< PD수첩 >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의견을 냈고, 핵심 과제로 ‘지역MBC 광역화’를 주장했다. 결국 김재철은 방문진의 여당 인사 다수의 지지로 사장 자리에 낙하했고, 그 후 < PD수첩 >은 ‘4대강, 수심 6m의 비밀’ 편이 방송금지가처분 신청으로 인해 1주일 후 방송, ‘여의도 1번지 사모님들’ 편이 불방되었다. 그리고 이번 사표 사태의 발단이 된 진주-창원 MBC 통폐합 등 지역 MBC에 대한 통합을 추진해왔다. 밀월관계는 은밀할 때 더 애틋한 법이건만, 이 ‘왕의 남자’는 숨는 법이 없다.


문학 중년 김재철의 낭독의 발견

김재철 사장의 취임 후, MBC 노조는 그의 출근을 저지했다. 이에 김재철 사장은 이튿날인 2010년 3월 3일 여의도 MBC 사옥 주차장에 천막을 설치해 임시집무실로 삼는 깜짝 쇼를 벌였다. 경비 1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천막에서 시작된 임원회의는 노조 집행부의 항의로 중단되었고, 그 과정에서 김재철 사장은 “공정방송 하겠다. 당당히 권력과 맞서겠다. 약속 지키지 못하면 사원들이 저를 한강에 매달아 버리세요. 남자의 약속은 문서보다 강한 게 말이다”고 말했다. 지금 그 약속이 과연 지켜졌는지 모르겠다. 다만, 문서로 작성한 사표를 말로 번복했으니 ‘문서보다 강한 게 말이다’라는 거 하나는 지킨 것 같다.


문학 중년 김재철의 낭독의 발견


김재철 사장은 2010년 3월 19일 ‘긴급기자회견’을 열었다. 방문진 김우룡 이사장이 <신동아 4월호>와의 인터뷰에서 “큰집(청와대)이 김 사장을 불러다 ‘쪼인트’ 까고 (김 사장이) 매도 맞고 해서 만들어진 인사”라고 밝힌 데 대해 그는 기자회견에서 “김우룡 이사장의 신동아 4월호 인터뷰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보도로 MBC 명예가 훼손됐다. MBC 수장으로서 김우룡 이사장을 형사고소하고, 민사소송도 제기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자회견에 앞선 모두발언에서 김재철 사장은 자신을 둘러 싼 논란과 의혹을 적극 해명하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특히 “저는 좀 답답하고 그러면 아 요즘 진짜 개나리도 좋고 진달래도 좋은데. 진달래 개나리가 좀 같이 피어서 어우러졌으면, 상생하면 좋겠는데 우리가 진보냐 보수냐 해서 논쟁을 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 이게 옳으냐 저게 옳으냐 해서. 노조하고 화합과 상생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친 여당적 인사라는 세간의 평을 해소하고자 했다. 인류의 역사만큼 오랜 진보-보수 논란을 봄날에 핀 꽃들의 어우러짐으로 수사하는 이 문학적 감수성! 이것이야말로 쓸데없는 고퀄리티다.


문학 중년 김재철의 낭독의 발견


김재철 사장은 모두발언에서 “올해까지 MBC 생활을 31년째 하면서 도덕성에 상처받을 일 (없었다), 내가 집이 두 채가 있나, 고향에 땅을 한 평 가졌나. 서울 근교에 여러분도 갖고 있을 콘도도 하나 없다. 아무것도 없다”라며 청렴함을 강하게 어필했다. 이어 왜 김우룡 이사장을 고소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김우룡 이사장의 신동아 건으로 인해 가장 피해를 받은 사람은 나 자신이다. 내가 기자생활 31년 하면서 그렇게 먹물을 뒤집어쓴 적이 없다. 도덕성이나 다른 면에서. 보도국에서도 한때 내 별명이 영국신사라고 했다. 그런데 완전 먹물을 뒤집어썼다”라고 말했다. “부인할 수 없는” 관계로 인해 자신의 도덕성이 의심받을까 두려운 마음은 십 분 이해하지만, 난데없이 콘도와 영국신사라니. 술자리에서나 나올법한 자질구레한 이야기로 지루한 기자회견장을 뒤흔든 이 개그 센스! 사장님, MBC 개그맨들에게 사내 특강을 추천합니다.


문학 중년 김재철의 낭독의 발견


김재철 사장은 MBC 노조의 파업에 대해 “불법행동, 불법파업이기 때문에 노조에서 조건을 자꾸 얘기한다면 나는 그걸 받지 않을 거고, 계속 얘기한다면 더운 여름이 올 때까지, 여의도 공원에 단풍이 들고 겨울에 눈이 내려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다”라고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에 노조가 전제조건을 바꾸지 않는 한 절대 협상은 없느냐는 질문이 이어지자 그는 “사실 내가 그렇게 막대처럼, 철로 된 사람처럼 딱딱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우리 고향에서 대나무 밭을 좋아하는데 대나무는 똑바로 서 있지만, 꼿꼿하지만, 항상 유연하게 바람에 흔들리지 않나. 그리고 내가 낚시 전문가인데, 낚시할 때도 대나무를 쓰는데 휙 휙 잘 된다”는 말로 대답을 시작했다. 이는 앞의 발언과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들렸지만, 이어 “인사권은 사장이 행사하는 거다. 세상 어느 회사가 인사권 가지고 부사장을 임명 못하면 내가 사장인가?”라고 말해 뜻을 굽히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그가 대나무 같은 사람인 줄은 잘 모르겠으나, 사의 표명과 번복을 하며 MBC는 물론 국민들까지 들었다 놨다 한 것을 보면 낚시 실력 하나는 좋은 듯하다.


문학 중년 김재철의 낭독의 발견


김재철 사장은 2010년 가을 개편에서 탐사보도 프로그램 <후 플러스>와 시사교양 프로그램 <김혜수의 W>, 음악 프로그램 <라라라>를 폐지했다. 취임 초기부터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시청률부터 올리고 난 뒤에 공영성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공공연하게 시청률과 제작비 중심의 운영을 천명해 온 그다운 행보였다. 이와 함께 <주말 뉴스데스크>를 기존 9시대에서 8시대로 변경했다. 시청률 꼴찌 탈피는 물론, SBS 뉴스와의 대결을 통해 앞뒤로 방송되는 주말드라마의 시청률을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이에 노조는 “실패 했을 경우 감수해야 할 부분이 너무 크다. 메인 프로그램인 뉴스데스크가 드라마 시청률에 밀려 좌지우지되는 상황 자체가 우려된다. MBC 뉴스데스크가 40년간 쌓아온 스테이션 이미지가 훼손된다면 다시 회복하기는 굉장히 힘들 것이다.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고 지적하며 개편안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김재철 사장은 “실패할 것이란 생각을 먼저 하면 안 된다. 책임은 제가 질 것이고, 실패한다면 제가 두 손 두 발 들고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주말 뉴스데스크>는 개편 후 첫 방송부터 멘트를 외우지 못 한 기자의 사고를 시작으로 온갖 패러디를 양산한 ‘폭력성 실험’, 자극적인 살인사건 현장 보도 등 잦은 방송 사고와 연성화 된 뉴스로 비판 받았다. 직립보행의 인류가 공중부양을 하지 않는 한 두 손 두 발 다 들 수 없으니, 이 말은 결국 안 나가겠다는 뜻인가.


문학 중년 김재철의 낭독의 발견


7월 29일 돌연 사표를 낸 김재철 사장은 불과 3일 만인 지난 1일 오후, 방문진 이사들의 요구에 따라 이사회에 출석해 “(사표 제출은) 지난 20일 방송통신위원회가 진주-창원 MBC 통폐합 승인을 보류한 데 대한 항의의 성격”이었고, “사퇴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재신임을 묻고 싶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에 방문진 이사회와 정수장학회는 이날 저녁 주주총회를 열어 찬성 6표, 기권 3표로 김 사장의 재신임을 확정했다. 뜬금없었던 사의 표명만큼이나 어이없었던 번복과 재신임 과정을 두고 일각에서는 “MBC 사장 자리가 무슨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회전문이냐”는 조소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MBC 노조는 김재철 사장의 복귀를 인정할 수 없다며 그의 출근을 저지하고 9월로 예정된 총파업 일정을 앞당겨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문학 중년 김재철 사장이니, 이 말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낙장불입(落張不入)’과 ‘일수불퇴(一手不退)’. 한 번 내어 놓은 패는 물리기 위해 다시 들 수 없다. 이 규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그 판은 99% 엉망이 된다.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10 아시아 편집. 장경진 thre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