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진수 기자] 스파이, 남성잡지ㆍ패션 모델, TV 쇼 진행자, 정당인, 금융뉴스 편집장, 그리고 벤처투자 브로커. 미국에서 암약하다 지난해 러시아로 추방된 미녀 스파이 안나 채프먼(28)의 다양한 직업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안나가 벤처투자를 러시아에 유치하는 일까지 맡게 됐다고 7일(현지시간) 보도한 바 있다. 경제 주간지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최신호(20일자)는 이와 관련해 "안나가 이끌게 될 벤처캐피털 펀드의 설립 취지는 아이디어로 넘치는 러시아 청년들을 러시아에 붙들어놓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러시아 당국은 첨단 기술 확보 및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에너지와 광업에 편중된 경제구조를 다변화하기 위해서다. 러시아 인근 소도시 스콜코보에 해외 정보기술(IT) 기업과 대학을 유치해 러시아판 실리콘밸리를 건설한다는 '스콜코보 프로젝트', 나노기술 개발을 위해 설립한 국유 기업 로스나노, 모스크바를 세계의 금융 중심지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정부의 노력 모두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스콜코보 프로젝트의 성공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밝힌 안나는 러시아 서남부 볼고그라드주(州) 볼고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안나의 본명은 아냐 쿠슈첸코로 아버지 바실리 쿠슈첸코는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출신이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안나는 2000년 런던으로 건너가 자가용 비행기 임대업체 넷제츠, 바클레이스 은행 등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중 2001년 영국인 알렉스 채프먼를 만나 결혼하고 영국 시민권도 땄다.
2005년 알렉스와 이혼한 안나는 이듬해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이후 2년 정도 온라인 부동산 중개업체 '프로퍼티파인더'를 운영했지만 적자에 허덕이다 2009년 갑자기 직원 50여 명을 거느린 기업인으로 우뚝 서게 됐다. 이 과정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미 법무부에 따르면 안나는 평범한 시민으로 위장한 채 러시아의 다른 비밀요원들과 함께 미국의 무기류, 외교전략, 정치상황 등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해 러시아로 넘겼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오랜 추적 끝에 지난해 6월 안나를 겨우 체포할 수 있었다.
안나는 러시아로 추방된 이후 몇몇 남성잡지의 모델로 세미 누드를 선보이고 폰드세르비스 은행 총재의 고문으로 고용된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의 통합러시아당 외곽 청년 조직인 '청년근위대' 지도부에도 합류했다.
지난 1월부터는 민영 REN TV의 주간 프로그램 '안나 채프먼이 진행하는 세계의 미스터리'를 맡고 5월에는 '벤처 비즈니스 뉴스'라는 월간지 편집장으로 고용됐다.
러시아 엘리트 집단에 안착한 채프먼에게 한 기자가 "대선에 출마할 용의는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채프먼은 "푸틴 총리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 모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과 출신인데 난 그곳 출신이 아니니 기회는 물 건너간 것 같다"고 한마디.
이진수 기자 com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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