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민진 기자] 1869년 수에즈운하가 개통됐다. 이로써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뱃길이 3분의 1로 단축됐다. 173km에 달하는 수에즈운하는 지금까지도 인류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수에즈운하는 건설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이후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하천공사나 운하 개통이 속속 진행됐다. 그러나 수에즈운하가 금융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최근 국내 금융권과 건설업계의 골칫덩이가 돼 버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기법이 바로 수에즈운하에서 시작됐다.
이집트 왕이 프랑스 사업자에게 운하 개통권과 사용권을 줬고, 이를 토대로 운하 설립을 위한 특수목적법인이 설립됐다('Universal Company of the Maritime Suez Canal'이란 이름의 '다국적 기업'이다).
이 회사는 당시 2억 프랑(300만 파운드)의 자본금을 주식발행을 통해 조달했다. 1주에 500프랑이었는데, 프랑스의 한 투자자가 20만 7000주를, 이집트의 지방 태수가 17만7000주를 인수했다고 한다. 특수목적법인이 99년간 운하의 소유권을 보유한 뒤 이집트 정부에 넘기는 조건이었다. PF 형태로 추진된 사업인데 아마 PF가 아니었다면 수에즈운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PF는 특정 프로젝트의 사업성, 즉 미래가치를 담보로 돈을 조달하는 금융 형태다. 사업이 진행되면서 얻어지는 수익금은 PF 대출금 상환에 쓰인다. 부동산 경기 호황기에 PF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시행사(개발업체)들은 자금 없이도 대형 건설업체의 신용을 이용해 금융회사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끌어들였고, 금융회사는 짭짤한 이자와 수수료를 챙겼다. 해외 부동산개발 열풍이 불던 불과 몇 년 전 국내 시중은행들은 현지 시공사에 대한 지급보증도 없이 투자에 나서기도 했다. 이를 '진정한 의미의 PF'라며 스스로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금융의 안전성이 강조되고 국내 건설ㆍ부동산경기 침체로 황금알을 낳던 PF사업장이 애물단지로 전락하면서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하이 리턴(High Return)'에 대한 기대는 결국 고위험으로 되돌아왔고, 수십 년 기반을 다져온 흑자기업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했다.
국내 건설업체로는 최초로 두바이 개발사업에 성공한 반도건설이 18일 우리은행 등에 1000억원대의 PF 대출금을 상환한다. 돈을 빌렸으니 갚는 게 당연한데도 은행이 고마워하는 것을 보면 최근 PF부실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이 간다.
142년전 금융과 건설이 만나 수에즈운하라는 역작을 만들었는데, 아직도 부작용이 만만치 않은 것을 보면 세월이 흐른다고 모든 게 다 발전하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김민진 기자 asiak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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