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전성호 기자]지난 5일, 인구 11만의 농업도시 경상북도 상주가 들썩였다. 모든 시민들의 시선과 발길이 한 곳으로 모였다. 바로 상주시민운동장에 열린 상주 상무와 인천 유나이티드의 ‘현대오일뱅크 K리그 2011’ 개막전 덕분이었다.
기자도 아침 일찍 서둘러 서울을 출발, 상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남상주 IC를 지나자마자 K리그의 열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거리 곳곳에 상무피닉스축구단의 상주 입성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발견한 것 역시 상주 상무의 선전을 기원하는 대형 통천. 편의점 등에서도 상주상무의 포스터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경기장까지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일부러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기사만큼 프로스포츠에 대한 지역 사회의 열기를 정확히 파악하는 '자문위원'은 없기 때문. "상주시민운동장이요"라고 행선지를 밝히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곧바로 대답이 온다. "축구 보러 오셨는교?"
택시 기사가 들려준 상주의 축구 열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프로구단이 이곳에 생긴 것은 처음이라 반응이 뜨겁다. 표도 거의 매진됐을 것”이라고 전했다. 더불어 “주변도시인 구미, 예천, 충주에서도 사람이 몰려 올 것”이라 예상했다. 지나는 풍경 속에서도 상주상무의 홈경기를 알리는 현수막과 홍보물은 계속 눈에 띄었다.
5분여를 달려 상주시민 운동장에 도착했다. 경기 시작 3시간 전이었지만 경기장 근처 도로는 이미 차로 꽉 차 있었다. 경기장 초입부터 각종 먹을거리를 파는 포장마차도 즐비했다. 단순한 K리그 개막전을 넘어서 지역 축제로 승화된 분위기였다. 시민들의 모습에는 하나같이 기대감과 생기가 가득했다.
사실 상주는 과거 ‘콘서트 참사 사고’로 큰 아픔을 겪은 바 있다. 이 때문인지 경찰은 물론 해병대전우회까지 대거 출동해 교통정리에 나섰다. 경찰 관계자는 "예전 안 좋은 기억도 있는데다, 상주에 이런 대형 이벤트는 오랜만이라 시 전체 경찰이 잔뜩 긴장 중"이라고 밝혔다.
상주시 해병대 전우회장 권복록(54)씨 역시 "오늘 분위기가 최고조다. 오랜만의 큰 행사에 시민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다. 2만 명 이상 올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경기장 바로 앞에는 수많은 시민과 각종 판촉행사장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상주 특산물인 한우와 곳감 등도 시식할 수 있었다. 상주 상무의 엠블럼을 내건 간이 식당에선 가족 단위, 친구 단위로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와 함께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대학 친구들과 함께 경기장을 찾았다는 홍성재(22)씨는 "상주라는 곳이 문화 산업이 많이 없는 편이다. 경북대학교 캠퍼스 등이 있어 학생도 많은데 제대로 된 극장조차 없어 즐길만한 여가 문화가 없었는데, K리그 팀이 들어와 무척 반갑다. 이런 활기찬 분위기는 오랜만"이라며 들뜬 모습이었다. "박주영과 기성용이 보고 싶다"는 '뼈 있는 농담'도 던졌다.
방과 후 친구들과 함께 교복차림으로 경기장을 찾은 양현숙(17)양 역시 "상주에서 이런 큰 경기는 오랜만이다. 열광적인 분위기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더불어 "김정우, 최효진 같은 대표팀 선수들을 직접 볼 수 있어 즐겁다"고 덧붙였다.
대형 관광버스도 수시로 경기장 주차장에 들어섰다. 상주 시내 학교와 향우회는 물론, 타지역 친목 단체 등도 눈에 띄었다. 한 관계자는 "몇몇 학교는 오늘 경기를 위해 학교 정규 수업도 단축하고 체험 학습 차 단체 관람을 왔다"고 귀띔했다.
아무래도 농업도시다 보니 관중 가운데 노년층의 비율도 높았다. 상주의 유니폼까지 갖춰 입은 어르신도 많았다. 민영대(65)씨는 "상주는 공장도 없고 오직 농사만 짓는 곳이라 인구는 적지만 그만큼 서로 똘똘 뭉친다. 오늘 축구 경기도 시 전체의 잔치인 셈"이라며 즐거워했다.
경기 시작 두 시간 전에는 연예인 축구단의 시범경기가 있었다. 이어 명예상주시민으로 위촉된 태진아를 비롯하여 마야, 성진우 등 인기가수의 축하공연이 이어졌다. 경기 시작 직전에는 상주시 여고생들로 구성된 대취타대의 연주도 있었다.
15,000석 정원의 경기장에 들어찬 관객은 16,400명. 이미 4,000장이 팔린 가족연간회원권에 현장 구매까지 더해진 덕분이다. 자리에 앉지 못한 관중들은 계단에 걸터앉거나 서서 관람해야 했다. 자칫 안전사고도 우려될 만 했지만 과거 아픈 경험이 있던 상주 시민들은 안전 요원들의 지시에 잘 따르며 성숙한 자세를 보여줬다.
시민들의 뜨거운 열기 속에 상주는 당초 예상을 깨고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인천을 압도했다. 조직적인 서포터즈 응원은 아직 없었지만, 상주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관중들은 자연스러운 함성으로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간판스타' 김정우는 경기 시작 5분 만에 페널티킥 선제골을 뽑아냈고, 후반 4분에도 추가골을 터뜨려 상주시민운동장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결국 상주는 2-0으로 인천을 꺾고 K리그 데뷔전에서 승리하는 기쁨을 누렸다. 팬들도 “오늘처럼 상주가 재밌는 축구를 한다면 앞으로 계속 경기장을 찾을 것”이라며 한껏 고무된 모습이었다.
이수철 상주 감독은 경기 후 “사실 지난 일주일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출범식 때 상상 외의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신 걸 보고 놀랐다. 잘못했다간 시민들에게 맞아 죽을 것 같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오늘은 발 뻗고 잠 좀 푹 자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경기에서 두 골을 몰아친 김정우도 “광주에 있을 땐 이만큼 많은 관중 앞에서 경기한 적이 없었다"며 "경기하는 내내 정말 기뻤다. 경기할 맛이 났다. 관중의 응원이 많아서 즐거운 경기였다"며 웃음 지었다.
구단 관계자들도 한껏 들떴다. 성백영 상주 시장은 “상무 덕분에 상주시의 브랜드 가치도 급상승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이어 “인구 11만의 작은 도시가 프로축구단의 연고지가 된 것이 매우 이례적인 만큼 프로축구를 통해 상주 시민의 화합과 자긍심을 높이고, 성공적인 운영을 통해 팬들에게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조용배 상주시 축구협회장 역시 “상무가 상주로 온다고 했을 때 꿈을 이룬 느낌이었다. 지역사회 축구문화의 발전이 현실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상무를 통해 자생력을 키워 향후 상주 시민구단의 창단까지도 계획 중”이라고 덧붙였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상주 시민들의 K리그 사랑은 이어졌다. 상주 시내 식당가 TV는 대부분 드라마나 인기 예능프로그램 대신 이날 경기 재방송이 틀어져 있을 정도였다. 각 테이블에도 경기와 상무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그렇게 K리그는 조용한 지방 소도시에 기쁨과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날 상주 구단과 상주 시민들의 모습에서 K리그만이 가질 수 있는 경쟁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문화행사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방 소도시에 상주상무가 안겨준 즐거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대도시를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는 프로야구나 팀 수가 적은 프로농구, 프로배구 등 타 종목에선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올 시즌 350만 관중 시대를 선언한 K리그에 상주의 예사롭지 않은 축구 열기는 많은 부분을 시사하고 있었다.
스포츠투데이 전성호 기자 spr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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